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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종언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
  • 정재원, 국민대학교 유라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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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1단계 철수 중인 소련군

RIA Novosti archive, image #644460 / Yuriy Somov (CC BY-SA)




 

<개혁의 시작: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러시아 연방 남서부 스타브로폴 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52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고 그해 공산당원이 되었다. 19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공산주의 청년동맹과 당 조직에서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역 당위원회 제1서기에 올랐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197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지명되었고 농업담당서기(1978)와 정치국원(1980)을 역임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재임 기간 유력한 차기 후보로 부상한 그는 1985310월 체르넨코의 사망 이후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집권하자마자 무능하고 노쇠한 당 간부들을 해임하고 능력 있는 새 인물로 교체하는 등 당 쇄신부터 착수했다. 정체에 빠진 경제 활성화를 최고의 목표로 삼은 고르바초프는 당내 권력을 다진 후 1987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소위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과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정책으로 알려진 일련의 개혁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 기조 하에서 사회적으로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크게 확장되어 언론은 현실 비판에 있어 전에 없는 자유를 구가했으며,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사회단체 조직들이 생겨났다. 정치적으로는 복수 후보자의 경합 하에 부분적 비밀 투표가 행해졌고, 특히 경제 침체 극복을 위해 시장경제가 도입됐다. 경제적으로도 국가 보조금과 명령에 의존했던 산업체들이 스스로 생산을 관리하게 되었고, 사적인 기업 활동이 허용되는 등 시장경제적 요소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후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반발 속에서도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입법·행정기구를 당과 독립시켜 권력을 분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98812월 헌법 개정에 따라 양원제 의회인 인민대표대회를 창설하였다. 19893월에는 소련 역사상 최초로 복수 후보·직접 선거의 원칙에 의거하여 선거를 실시하였고, 5월에는 서구와 유사한 대의기구로 변화한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이를 위해 198712월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협정’(INF Treaty)에 서명했고, 다음 해에는 9년간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철수했다. 또한 1989년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반소련/반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하지 않았고, 이후 이어진 정권 붕괴,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 및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인정했다. 1990년 여름에는 동·서독의 통일을 수락하고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도 허용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평화적 행보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대혼란: 분리독립운동, 경제 문제, 보수파 반대>


그러나 소련 내에서는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확대되자 각 민족 단위에서 자치권 확대 및 분리 독립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일부 공화국에서는 민주화와 민족 갈등 문제로 소요가 일어났다.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서는 강한 분리독립운동이 발생했다. 중앙아시아의 민족 충돌과 조지아에서의 반소 시위를 유혈 진압한 고르바초프는 19903월 리투아니아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자 경제 봉쇄를 통해 이탈을 막고 연방 탈퇴의 법적 요건을 마련하기 위한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한편, 그는 여러 국가 권력을 행정기구로 대폭 이관했다. 19903인민대표회의에서 소련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강력한 행정 권력을 갖게 되었고,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폐지하여 복수 정당제의 틀을 마련했다. 이렇듯 소련에 대의제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데는 성과가 있었으나 경제 개혁은 난항을 거듭했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와 대안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급격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및 서구 주도의 자본주의가 소련에 가져올 위험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개혁의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그는 보수파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 새로운 법령과 개각을 시도했으나 행정부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고, 결국 개혁의 속도가 늦어지면서 보안 기구와 당내 보수파들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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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레이건 대통령, 부시 부통령, 소련공산당 고르바초프 서기장


     


<거대한 실험의 끝: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종언>


1991819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 정책을 되돌리려던 강경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보리스 옐친 등 개혁파 인사들의 주도로 소련 전역에서 반쿠데타 시위가 벌어지는 등 전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 3일 만에 진압되었다. 829일 최고 소비에트가 공산당의 활동을 정지한 후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대폭 축소된 반면, 반쿠데타 세력을 주도한 옐친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제 및 영토 통합성 붕괴를 우려한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의 주권을 강화한 신연방조약안을 내세웠지만 분리 독립을 원하는 소수 민족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발트 지역의 3개 공화국을 필두로 몰다비아,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은 신연방 불참을 선언했다. 옐친 역시 러시아연방공화국의 권한 확대를 주장하며 조약안의 대폭 수정을 요구했다.


마침내 1991128일 소련에 속했던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공화국 등 주요 3국 지도자가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하면서 고르바초프의 연방 해체 저지 노력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1221일에는 조지아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 협정안에 서명함으로써 1917년 사회주의혁명과 함께 출범하여 70여 년간 이어져 온 소련은 종말을 고했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막도 내렸다. 그리고 1225일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하였다.


소련 해체 이후 그는 환경과 아동 인권 등을 위한 고르바초프재단을 설립했고, 같은 해 국제녹십자 초대 총재에 취임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계열의 제 정치 세력 대표로도 활동했다. 서방 세계에서는 사회주의 체제의 평화로운 종언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국가를 붕괴시킨 주범으로 폄하되어왔다. 고르바초프가 추구한 개혁은 시장 체제 하에서는 국가 간에서나 국가 내 계급·집단 간에서나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지를 보여 주었다. 영미식 자본주의가 아닌 북구식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도모했으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는 급속히 붕괴되었고 대안은 많지 않았다. 결국 체제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기대했던 서구의 지원은 기대에 못 미쳤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급격한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은 총체적 혼란을 야기했다. 소련이 붕괴된 지 30여 년이 지난 현재, 고르바초프가 그렸던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번영의 꿈은 아직도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