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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오키나와 미야코섬 일본군'위안부' 추모비 건립 11주년 행사 참관기 “노바루의 아리랑비로 갑시다!”
  • 박정애 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태풍을 뚫고 다시 모인 사람들


201997, 오키나와 미야코섬에 아리랑비가 건립된 지 1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태풍 링링이 올라오는 상황 속에서 우리 가족은 오키나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키나와행 항공기 출발 1시간 지연, 오키나와 나하 공항 도착 30분 연착 그리고 놓쳐버린 미야코섬행 국내선 탑승 대기 2시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여정의 시작부터 우리를 짓눌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미야코섬.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미야코섬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 5시에 추모식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미야코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추모식 참석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주최 측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폭우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택시를 타고 오라는 것이었다. “노바루(野原)의 아리랑비로 가자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노바루는 아리랑비가 있는 마을 이름이다. 그런데 택시 기사들 중 아리랑비의 위치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택시 4대를 보내고 5번째 택시 기사가 노바루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찾아가 보겠다고 했다. 택시는 폭우를 뚫고 웅덩이를 가로지르고 때로는 길을 잘못 들면서 겨우 아리랑비를 찾아갔다. 비에 흠뻑 젖은 우에자토 씨 부부, 가와미츠 씨, 나카하라 선생님, 홍윤신 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일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이들만 남아서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1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사람은 떠나도 기억은 이어 간다


지난해 추모비 건립 10주년에도 오키나와 나하와 미야코섬에서 심포지엄이 열렸고, 서울과 도쿄, 오키나와에서 모인 사람들이 어우러져 북적북적한 행사도 치렀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 덕분에 충실한 준비와 풍성한 행사가 가능했다. 지난해 두 번째로 추모 행사에 참석했던 나는 위안부에 대한 오키나와의 기억과 기념방식이 갖는 특별한 의미에 내내 울컥했다. 그러나 업무로 참석한 자리였기 때문에 차분히 그 기분을 돌아볼 수 없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오키나와의 재일조선인 김현옥 씨는 1944년 오키나와에 위안부로 끌려와 1991년 오키나와에서 돌아가신 배봉기 할머니와 평생을 함께했다. 그녀는 작년 추모 행사에서 오키나와의 이야기가, ‘위안부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무척 감격스러워 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서 더없이 기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 말에 감격한 나는 내년에는 내 아이를 데리고 와야지 다짐했다.


그런데 추모일 이틀 전인 95, 김현옥 씨의 동지이자 남편인 김수섭 씨가 작고했다. 홍윤신 씨는 96일 나하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미야코섬으로 왔다고 했다. 11주년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홍윤신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수섭 씨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서로 만나 기쁘고 우리를 보고 기뻐서 눈물을 흘리나 봐요. 이렇게 비가 오는 걸 보니...... 우리는 배봉기 할머니와 함께 김수섭 할아버지도 잊지 않을 겁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는 이곳, 추모비가 서 있는 터에 여전히 있어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전하고 확장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홍윤신 씨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 아이와, 함께 온 친구 아이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대한 임무를 이어가야 하는지 알고 있을까? 역사는 명분, 제도 혹은 경제적 수치의 집합체가 아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를 버텨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명분이나 제도, 경제적 수치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에 사람들은 기억, 평화, 정의, 인권을 내걸고 잘못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응답자들 또한 이야기를 남기고 하늘로 돌아가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져 더욱 크고 강한 울림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미야코섬 '위안부' 추모비 건립 10주년 기념 사진            11주년 기념 사진


미야코섬 '위안부' 추모비 건립 10주년 기념 사진(왼쪽)과 11주년 기념 사진(오른쪽)

 




'노바루의 아리랑비'로 갑시다!


매년 그렇듯 올해도 기념비 설립 다음 날인 98일 작은 심포지엄이 열렸다. 나는 심포지엄에서 소박한 발표를 했고 이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여 미야코섬의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 끝 무렵, 한 남자가 손을 들고 위안부가 왜 성노예인지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카하라 선생님과 우에자토 씨 그리고 내가 나서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는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하며 다시 위안부가 왜 성노예인지 설명을 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직감적으로 그 남자는 자신의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설명을 이어간 나도,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카하라 선생님과 미야코섬 사람들은 열심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꾸준히 설명하다 보면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변화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요나하씨가 자신이 봤던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기억을 다시 전했다. 빨래를 하기 위해 우물과 위안소를 오가던 미야코섬의 조선인 위안부는 요나하 씨 집 근처의 바위에서 잠시 걸터앉아 쉬었다. 소년 요나하의 눈에 그 사람은 앗바라기누나였다. ‘앗바라기는 아름답다는 뜻의 미야코섬 사투리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되어 바위 사이에 난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요나하 씨는 일본군 위안소를 연구하기 위해 미야코섬을 방문했던 유학생 홍윤신 씨를 우연히 만났다. 200897일 그 바위는 그대로 아리랑비가 되었다. ‘아리랑비뒤에는 새로 세운 추모비 여성들에게가 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나카하라 선생님이 말했다. “우리에게 새로운 미션이 생겼습니다. 미야코섬에 올 때마다 택시 기사에게 노바루의 아리랑비에 갑시다라고 합시다. 그렇게 아리랑비를 계속 알려 나갑시다내년 97일 즈음 추모비 건립 12주년 행사가 열린다. 그때 미야코섬에 닿으면 택시를 타고 노바루의 아리랑비로 갑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가는 길에 택시 기사에게 노바루의 아리랑비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