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나하시에 위치한 슈리성
1879년 1월, 국제사회에 류큐국의 '자주'를 호소하다
1879년 1월 26일 일본 내무성에서 류큐 문제를 담당하는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가 다시 류큐번(琉球藩)에 도착했다. 지난 1875년 5월, 당시 외무대승이었던 마쓰다가 류큐번을 방문하고 요구했던, 청에 대한 조공을 그만두고 번정을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틀 후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신문 『센바오(申報)』에 류큐의 사법관이 네덜란드 공사 자베르에게 보낸 편지가 실렸다. 류큐국 존망의 위기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만큼 잘 나타나 있는 사료가 없으므로 다소 긴 내용이지만 전문을 담는다.
류큐사법관 모 호우라이(毛鳳來)와 바 켄사이(馬兼才) 등은 류큐가 조약을 맺고 있는 대국에게 위기에 빠진 소국 류큐에게 조급히 힘을 빌려 줄 것을 요청합니다.
소국인 류큐는 명대 홍무(洪武) 5년・서력 1372년에 중국에게 조공한 이래, 영락(永樂) 2년・서력 1399년에 선왕 부네이(武寧)가 명조로부터 중산왕(中山王)에 봉해지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외번(外藩)에 속하고 중국의 연호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내정은 자치를 허가받고 있습니다.
대청국 이후는 2년에 1회 조공을 정례화하고, 대청국 황제의 즉위 대례에는 축하를 위해 반드시 가신을 파견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국왕이 즉위할 때에는 새로운 왕을 중산왕에 봉하는 대청국의 사절이 방문을 합니다. 가신의 자제도 북경의 국자감에 유학하고 있으며, 만약 우리나라 선박이 난파 표착한 경우는 각성 총독이나 순무가 식량을 주고 배를 수리하는 등의 원조를 하고 귀국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외번이 된 이래 지금까지 500여 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함풍(咸豐) 9년・서력 1859년 즉 일본의 안세이(安政)6년에 대네덜란드국 전권공사 자베르가 통상조약체결 때문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만, 이때 약 7항으로 이뤄진 조약에는 한문과 대청국 연호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증거가 되는 문서가 귀 공사에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대합중국, 대프랑스국도 우리나라와 조약을 맺었습니다만, 그 당시 일본과는 옛 사쓰마번(薩摩藩)과 왕래가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동치(同治) 11년・서력 1872년, 즉 일본의 메이지(明治) 5년에 이미 사쓰마번을 없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도쿄 정부의 소관으로 만들고 우리 국왕을 번왕으로 삼고 화족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섭업무는 외무성 관할이었습니다. 또한 동치 12년・서력 1873년, 일본의 메이지 6년에는 우리나라가 대네덜란드국, 대합중국, 대프랑스국과 맺은 조약 원본을 일본 외무성으로 인도하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나아가 동치 13년 즉, 서력 1874년・메이지 7년 9월에는 류큐에 관한 사무를 모두 강제로 일본의 내무성 관할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광서(光緖) 원년 즉, 1875년・메이지 8년에는 일본의 태정관 포고에 따라 청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조공과 우리나라가 청국의 책봉을 받는 것을 즉시 정지하고 번내의 연호는 메이지를 사용하며 일본 법률을 토대로 번내 관직제도를 개혁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몇 번이고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여 진정하였지만, 일본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소국이라고는 하지만 대청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대청국의 은혜로 자치가 허용되어 왔습니다. 현재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강제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대네덜란드국과 대청국 연호와 문자로 작성한 조약을 체결한 것은 틀림없으며, 이제 만약에 대청국과의 책봉・조공관계를 이전처럼 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조약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같은 소국은 살아남지 못하고 각각의 대국에게도 실례가 되며 특히 대청국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대네덜란드국은 당초 우리나라와 같은 소국을 경시하지 않고 정식으로 조약을 맺어 주었습니다. 귀국의 이 같은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와 같은 소국이 위기 존망에 빠져 있을 때, 대국이 일본에게 류큐국에 관한 모든 것을 이전대로 하도록 해준다면 우리나의 모든 신민은 그 은의(恩義)에 무한한 감사의 뜻을 표할 것입니다.
별도로 대청국 흠차대신 및 대프랑스국 전권공사, 대합중국공사에게도 문서를 보내어 이상과 같이 조처하도록 부탁할 예정입니다.(1879.01.28., 밑줄은 인용자, 이하 동일.)
류큐가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번에 속하고 중국의 연호와 문자를 사용하지만 내정은 자치를 허가받아 왔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는 그저 옛 사쓰마번과 왕래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현재 일본은 ‘청과의 책봉・조공 관계를 단절하도록 요구’하고 ‘일본 법률에 따른 개혁을 강요’하는 등 류큐의 자치를 부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네덜란드 등 대국이 일본에게 류큐국에 관한 모든 것을 이전대로 하도록 요구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류큐는 청과의 책봉・조공 관계, 즉 ‘내정의 자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협조해 주길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정의 자치’는 청의 연호 사용과 책봉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독립’이라기보다 ‘자주’에 가까운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같은 해 3월 27일에 군인 300여 명과 경찰관 160여 명을 류큐로 파견해 슈리성(首里城)을 점령하고, 이틀 후에는 류큐국의 마지막 왕 쇼타이(尚泰)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킨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류큐번을 폐하고 오키나와현 설치를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그 근거는 류큐국은 사쓰마번이 정복한 속국이고, 이제 사쓰마번은 일본에 속하므로 당연히 류큐국도 일본에 속한다는 논리였다. 류큐의 지배층은 일본 정부에 대한 불복종과 비협력 운동을 조직하고,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등 류큐국의 재흥과 책봉・조공 관계의 부활을 수년간 도모하였지만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자주’는 물론이고 ‘독립’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류큐국은 청의 '속국'이자 '자주국'이다
청은 일본이 류큐의 책봉과 조공을 금지시킨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관(舊慣) 부활을 요구한다. 다음은 『센바오(申報)』의 주장이다.
국제법에 따라 무릇 자주권을 지닌 나라라면, 가령 한 나라의 속국이라 해도 제3국과의 통교가 허용된다. 예를 들어 최근 베트남은 프랑스와 통상을 시작하여 사이공 지방은 프랑스의 영유 아래에 있으며 이미 조약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여전히 중국에 조공을 그만두려 하지 않고 있으며, 프랑스가 그것에 대해 문제시 삼는다는 말을 아직 들어본 적 없다. (중략) 류큐가 중국 조정에 조공하는 것을 일본이 저지해서는 안 되고, 하물며 반환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1875.03.26.)
일본은 무력으로 류큐를 위협하여 왕제(王制)를 없애고 국왕을 현주(縣主)로 삼았으며, 류큐의 영토를 일본의 판도에 병합하려 하고 있다. 그 태도는 지극히 횡폭한데, 타국은 일본의 야심을 멈추게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중략) 일본은 이런 행위가 리(理)를 결여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서양 각국에게 자신의 야망이 들키지 않도록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왜 이러한 행위를 하는가. 류큐는 예부터 중국의 속국이고, 이는 세계 각국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879.06.07.)
기본적으로 청은 류큐가 ‘속국’이자 ‘자주국’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은 청과 류큐의 책봉・조공 관계를 인정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류큐와의 관계를 ‘영토’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에 비해, 청은 류큐와의 관계를 ‘영토’가 아니라 ‘책봉・조공’이라는 관점에서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은 류큐가 ‘속국’이니까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청은 ‘속국’이니까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간추려 설명하자면 일본이 말하는 ‘속국’은 ‘독립국’인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고, 청이 말하는 ‘속국’은 ‘자주국’인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된다. 따라서 청이 주장하는 구관 부활은 류큐와 동일하게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기초한 ‘종주국’ 지위의 유지를 의미했던 것이다.
류큐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류큐라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우선 그들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에 충성을 맹서하고 있는 류큐국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했다. 영국인 셔먼(H.Shearman)이 상하이에서 발행한 주간지 『노스 차이나 헤럴드(North China Herald, 北華捷報)』에서 폴란드의 상황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한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류큐와 폴란드의 상황은 그다지 비슷하지 않다. 분명히 폴란드인은 3국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지만, 그것은 나라가 세 개로 분할되어 있는 것이지, 3국이 주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한 나라가 두 개의 나라에게 동시에 속하는 사례는 국제법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 사절은 확실히 논의에서 승리하였다. (중략) 류큐인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특별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라고 강제 받는 것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1876.08.05.)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주권’이다. 물론 주권의 개념은 서양식 근대 국제질서의 중심 개념이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 열기를 잃지 않고 있는 민족주의에 의해, 주권의 개념이 국제관계 속에서 확고부동한 최고 규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국제사회가 보기에는 일본과 중국에 충성을 맹서하는 류큐국은 매우 ‘특이’한 존재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류큐나 청의 주장, 즉 ‘자주국’임을 인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국가관 즉, ‘주권’을 보유하는 ‘독립국’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저 ‘특이’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류큐처분관 마쓰다 미치유키
류큐국 마지막 왕 쇼타이
류큐인, 청과 일본의 류큐국 '분할'에 죽음으로 저항하다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 ‘류큐처분’은 청에게 충격이었다. 이 사태를 만회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막는 것이 요구되었지만, 눈앞의 사태를 해결할 묘안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것이 미국의 전 대통령 그랜트(Ulysses Simpson Grant)다. 세계를 순회 중이던 그랜트는 1879년 5월부터 7월에 걸쳐 중국과 일본을 방문해 류큐 문제를 둘러싼 양자의 대립을 화해로 이끌기 위한 이른바 분도(分島)・개약(改約) 교섭을 중개했다.
분도・개약 교섭이란, 류큐의 모든 섬 중에서 미야코(宮古)와 야에야마(八重山)를 청에 할양하고, 그 대신 청일수호조규의 규정을 일본에 유리하도록 개정한다는 일본의 제안과 그를 둘러싼 교섭을 말한다. 청이 마지막까지 양보하지 않았던 것은 ‘속국’ 류큐의 부활이고, 일본 측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청 측도 청일수호조규의 개정에는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교섭은 난항을 겪었고,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청과 일본의 분도・개약 교섭은 류큐를 분할하는 것이었기에 당연히 당사자 류큐인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온전한 모습으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길 바랐을 뿐이었다. 류큐 분할이 거의 타결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탈청인(脫淸人)’(1876년 이후 청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청으로 건너간 류큐인) 린 세이코(林世功)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며 죽음으로 류큐 분할에 저항한다.
예로부터 충효를 다한 사람이 몇이나 될 고
나라를 걱정한 지 이미 5년이 되었구나
한번 죽어 사직을 건지길 바라노니
부모님은 형제에게 의지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