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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영화 <사도>에서 말하지 못한 것들 - 영화 <사도>를 보다 -
  • 김용흠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영화 <사도>에서 말하지 못한 것들 

영화 <사도>는 지난해 9월 개봉해서 600만 명 이상의 관객 몰이를 한 인기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국왕이 후계자로 지명한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이야기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어찌 보면 진부한 내용을 가지고 몇백만 명의 관객몰이를 했다는 점에서 감독과 배우들의 활약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조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도대체 왜 국왕이 세자를, 아비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이에 대해 당사자 영조는 물론이고,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그리고 정조가 작성한 사도세자 지문(誌文)을 비롯하여 당시 정계에서 활동한 노론·소론·남인 등 각 당파의 당론서까지 다양한 입장의 수많은 기록이 쌓여 있다. 아직까지도 학계에서는 이들 자료들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합의된 권위 있는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집안일의 관점에서 충실하게 재현한 사실 관계

그런데 영화 <사도>나랏일이 아닌 집안일이라는 관점에서, 정치적 배경을 제거한 채, 아비와 아들이라는 부자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건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려 했다. 천민 출신 국왕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진 영조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완벽한 군주의 자질을 기대했는데, 그것이 어긋나자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부왕인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패하자 일견 정신병과 같은 증상이 올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본 영조는 후계자를 정조로 바꾸는 것이 종사(宗社)를 보존하는 길이라고 생각,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스스로 죽는 것이 조손(祖孫)의 왕위 계승에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보았지만 사도세자가 이를 거부하여 어쩔 수 없이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즉 정조가 무난하게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그 아비인 사도세자가 역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루어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는 나름대로 사실 관계를 충실하게 재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두 시간도 넘는 상영 시간 동안, 일반 관객은 물론 전공자들도 소화하기 힘들만큼 엄청난 분량의 역사적 사실들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정말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는 관련 전공자들의 세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어쨌든 이를 통해 이 영화가 달성한 성과는 이전까지 학계에 남아 있던 정신병설을 분명하게 극복했다는 점이다. 비록 아비와 자식 간의 부자 관계로 제한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영조의 신경질적 성격이나 사도세자의 정신병 때문에 일어난 단순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회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개혁을 거부한 기득권층의 정치적 모략과 음모

이 영화의 한계는 감독과 제작자가 설정한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라는 구도 속에 내재되어 있다. 국왕과 세자라는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나랏일이 아닌 집안일이란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내용 가운데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왜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도 그가 한 일에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사도세자를 궁지로 몰고 갔을까? 어릴 때는 총명하게 아비의 기대에 부응했던 사도세자는 왜 갑자기 무예와 그림에 관심을 가져서 아비의 기대를 저버렸을까?


이런 사실들은 정치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성격설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8세기 조선은 특별한 외부의 위협이 없었는데도 끊임없이 위기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17세기 이후 백성들의 노력에 의해 생산력이 발전하여 경제 구조는 변동되는데, 사회적·정치적 관계는 이전의 신분적·계급적 특권에 의해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뜻있는 지식인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 개혁으로 양반, 지주 등 기득권층의 특권과 반칙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은 영조가 즉위할 무렵 상식이 되었으며, 정치적으로 탕평책 추진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사도세자 역시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이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탕평책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조의 즉위를 뒷받침했던 세력은 바로 이러한 탕평책을 반대하는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사도세자가 제도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박탈하려 하자 온갖 정치적 모략과 음모를 동원해 영조와 세자를 이간시키려 하였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기간에 양반 지주들에게 세금을 물리려는 장면이 그의 개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정순왕후 측에서 나경언 고변 사건을 모의하는 장면은 세자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상징한다. 영조와 세자의 극단적 대립은 이러한 정치적 맥락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조와 세자는 국가의 새로운 지향에 대해서는 견해를 같이했지만, 영조는 반대 세력을 포용하여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원했는데, 세자는 그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은 조선 왕조의 정치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국왕과 세자의 성격 탓이 아니라, 상식을 짓밟고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지배층의 정치적 모략과 음모의 산물이었다. 18세기 새롭게 등장하는 세력과 이들을 억압하려는 세력 사이에 전개된 격렬한 갈등이 구중궁궐까지 전해져, 최고 권력자인 국왕과 세자조차 목숨을 걸고 격렬한 파열음을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정조의 시도마저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조선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추진하지 못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멸망하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은 이러한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을, 영화 <사도>는 또한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