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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중국과 일본에 관한 다산 정약용의 생각
  • 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다산이 연암 박지원처럼 중국에 다녀왔다면 엄청난 저서를 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다산은 비록 중국·일본 등지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동북아 정세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799년 겨울, 다산의 가까운 친구 한치응(韓致應) 교리(校理)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다. 당시 북경으로 가는 사신은 판서급 이상인 정사(正使), 참판급 이상인 부사(副使), 정4품~6품인 기록관(記錄官) 이렇게 세 명으로 구성하였는데, 기록관이 바로 서장관이었다. 서장관이라는 직책을 받고 문명 국가인 중국에 간다는 생각에 우쭐했을 한치응에게, 다산은 송별사 한 편을 지어 주었으니 바로 '송한교리사연서(送韓校理使燕序)'다.

"대체로 해가 정수리 위에 있을 때를 정오(正午)라고 한다. 그러나 정오를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같으면 자기가 서 있는 곳이 동서의 중앙임을 알게 된다. ··· 이미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었으면 어디를 가도 중국이 아닌 나라가 없는데 왜 '동국(東國)'이라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어디를 가도 중국이라면 왜 별도로 '중국(中國)'이라고 한단 말인가."

천문지식에 근거하여 중화주의를 경계하다

숭명사상(崇明思想)과 중화주의(中華主義)에 찌들어 있던 당시에 코페르니쿠스 같은 발상전환을 엿볼 수 있다. 중국(中國), 즉 세계의 중심 국가라는 이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바라보는 지점과 각도에 따라 어디나 중심인데 왜 중국만 중심이라 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실로 조선인으로서 당당한 주체성을 지닌 태도라 할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천문지리에 관한 선진 지식이 있었다.

또, 요순의 정치와 공맹(孔孟)의 학문이 중국에만 있을 때와 달리 정치와 학문이 모두 조선에 전래되어 더 높은 수준으로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 가는 일이 자랑스럽냐고 반박까지 했다. 그러면서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생활에 편리한 기술이 그 곳에 있을 뿐이니, 북경에 가서 그것조차 배워오지 않으면 가는 일이 자랑스러울 이유가 없다고 타일렀다. 지금도 공적인 일로 선진국을 방문해서 사대에만 급급하며 진실로 배워올 것을 놓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다산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 대한 맹목적 숭배를 비판하는 다산의 생각은 '척발위론(拓跋魏論)'에서도 볼 수 있다. "성인의 법은 중국이면서도 오랑캐와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과 같은 행동을 하면 중국으로 대한다.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은 도와 정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지리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란 특정국의 전유물이 아니고 실제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으며, 중국이라는 이름만 보고 숭배하는 타성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배워 와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주체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중국에 관한 태도와 다르게 일본을 무조건 경원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산은 그런 선입관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에서 흘러 들어온 저서를 통해 일본을 경계하며 관찰했다. 이런 태도는 그의 '일본론(日本論)'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의 풍속은 불교를 좋아하고 무력(武力)을 숭상하기 때문에 연해(沿海)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보물과 식량과 포백(布帛)을 약탈, 눈앞의 욕심만 채웠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게는 근심거리가 되었던 바, 신라 때부터 일찍이 무사히 몇 십 년을 지낸 적이 없었고, 중국은 강소성과 절강성 지방이 해마다 노략질 당하였는데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노략질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호전적인 일본이지만, 다행히 임진왜란 후 200여 년간 일본과는 평화를 유지하였다. 다산은 '일본론'에서 과연 일본은 또 조선을 침략해올 것인지에 관해 당시 관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결론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당시 일본의 문채(文彩)가 무력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현재는 걱정할 것이 없다. 내가 이른바 고학(古學) 선생 이등씨(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가 지은 글과 적선생(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 태재순(다자이 슌타이太宰春臺, 1680~1747) 등이 논한 경의(經義)를 읽어 보니 모두 찬란한 문채(文彩)가 있었다. 이 때문에 지금은 일본에 대하여 걱정할 것이 없음을 알겠다."

그밖에 임진왜란을 통해 이익이 없어 원망이 많다는 점, 평화 교류로 이득을 보고 있다는 점, 조선을 둘러싸고 청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 일본 내부가 통일되어서 일부 세력이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점, 일본이 중국과 직접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 문물을 약탈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점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침략 걱정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이후 역사적 전개과정과 부합하지 않았음을 볼 때 결과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다산처럼 일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면 상황이 꼭 그렇게 전개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웃 나라를 평할 때도 실사구시를 기준으로 삼다

한편 다산은 '요동론(遼東論)'에서 세종과 세조대에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사실을 두고 의견을 개진했다. "우리나라 세종과 세조대에 이르러 마천령 이북으로 천리나 개척하여 육진을 바둑돌처럼 설치했고, 밖으로 창해 가까이 접근했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수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논하는 사람은 이를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다산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미 현실적으로 명이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설령 조선이 차지했더라도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척박하여 아무런 이익도 거둘 수 없는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적국을 증가시키는 일은 영명한 임금은 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요동을 차지하여 큰 나라가 되는 것을 통쾌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산이 현실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이 살던 때와 지금은 시대적 상황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웃나라를 무조건 숭배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 나라 실정을 예의주시하면서 문명과 실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다산의 자세는 지금도 꼭 필요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