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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군대 행렬에서 느껴지는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
군대 행렬에서 느껴지는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 안악 3호분 동쪽 회랑 동벽에 그려진 묘주(墓主)의 출행도다. 그림 속 묘주의 신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웅장한 행렬의 규모를 세밀하게 묘사한 점은 발견된 벽화들 중 단연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 표지 그림 : 안악 3호분 동쪽 회랑 동벽 출행도 안악 3호분 동쪽 회랑 동벽에 그려진 묘주(墓主)의 출행도다. 그림 속 묘주의 신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웅장한 행렬의 규모를 세밀하게 묘사한 점은 발견된 벽화들 중 단연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행렬의 앞부분은 3줄로 나뉜 문무 대신들이 말을 타고 나아가고, 그 뒤로 시종으로 보이는 자들이 따르고 있다. 묘주가 탄 수레 바로 앞쪽에는 악대와 기수, 시녀 등이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옆쪽으로 무장한 보병과 기병들이 묘주를 호위하고 있다. 보병으로는 창수(槍手)와 환도수(還刀手), 부월수(斧鉞手), 궁수(弓手)가 보이고, 기병으로는 긴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중장기병(重裝騎兵), 철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고구려 핵심 정예부대 개마무사(鎧馬武士)가 행렬의 좌우를 담당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100여 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물들이 등장하는 출행도를 매우 일목요연하게 구성했으며,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특색 있게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5세기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했던 고구려의 군사력, 고대인들의 출행 규모와 대열의 구성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감상하노라면 절로 고구려인들의 웅장한 기상이 느껴진다. 자료 참고 : 동북아역사넷
수준 높은 연구, 지혜로운 정책 대안 제시로 국민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신년사 수준 높은 연구, 지혜로운 정책 대안 제시로 국민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2016년 병신(丙申)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만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다사다난(多事多難)’ 가는 해를 아쉬워하고 오는 해에 새로운 기대를 걸면서흔히 건네는 이 흔한 사자성어가 실감나는 때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2015년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광복 이래 우리 선배들의 노력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자랑스러운 업적입니다. 그렇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상황은 광복 70돌을 맞이한 기쁨을 마냥 즐기도록 놓아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중국은 화평굴기(和平崛起)를 넘어 대국주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일본도 안보법을 개정하면서까지 방위력 강화에 나섰습니다. 북한 체제의 미래는 점점 더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번영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의 성공을 설명하는 역사관 정립은 미래에 어려운 국가적 선택을 뒷받침하는 배경이 될 것입니다.저에게도 지난 2015년은 매우 특별한 해였습니다. 지난해 9월 17일 동북아역사재단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입니다. 취임하자마자 국정감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현안을 처리하느라 쉴 새 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이런 와중에도 새삼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 모든 구성원들이 안팎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말 애쓰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실제로 우리 재단은 여러 사업 영역에서 많은 성과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 기반을 확립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3대에 걸친 전임 이사장님과 직원 여러분들께서 수고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초심으로 돌아가 국민 기대 겸허히 수용2015년은 동북아역사재단에 유난히 어려운 고비가 많았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재단의 활동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비판하신 국민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비판은 기본적으로 재단에 거는 기대가 각별하기 때문임을 잘 알고
정치가의 리더십과 시민사회 노력, 전후보상 실천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인터뷰 정치가의 리더십과 시민사회 노력, 전후보상 실천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한·일 두 나라는 국교 정상화 후 50년 동안 서로 이웃한 나라인데도 실타래처럼 얽힌 과거사 갈등을 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5년 11월 재단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는 “동북아 역사화해 학술 인프라 구축을 위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한·일이 갈등을 극복하고 역사화해로 나가기 위한 여러 논의들이 나왔다. 이 날 독일의 전후처리를 주제로 발표한 다무라 미츠아키 교수를 재단의 김관원 연구위원이 만났다. _ 편집자 주다무라 미츠아키(田村光彰) 일본 호쿠리쿠(北陸)대학 명예교수2006년 일본 가나자와에서 뜻 있는 일본인들과 함께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을 발족해 활동하고 있으며 이 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현재 일본 내에서 전후보상 관련 시민 운동에도 힘쓰고 있다.김관원 일본에서 전후 보상을 위한 시민운동을 하고 계신데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나자와(金澤)는 일본에서 ‘보수천국’으로 불리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또 가나자와는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暗葬地)’가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현재 가나자와에서 전개되고 있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활동에 관해 설명해 달라.다무라 미츠아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9일 가나자와에서 처형당했다. 그러나 군부는 시체를 몰래 묻어버렸고, 사람들은 그 시체가 묻힌 곳 위를 아무 것도 모른 채 걸어 다녔다. 전후 재일조선인들이 암장지에서 윤 의사의 유해를 찾아냈다. 현재 가나자와에서는 일본인이 만든 ‘윤봉길 의사와 함께하는 모임’과 재일조선인들이 만든 ‘월진회’ 일본지부를 통해 윤 의사의 독립정신을 함께 배우고 한·일 시민 간 우호를 다지자는 목표로 시민 차원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의거일인 4월 29일, 윤 의사의 고향인 예산군에서는 제향(祭享)이 개최된다. 우리는 매년 이 제향에 참가하고 있다. 6월에는 한국 월진회 회원을 가나자와에 초대하여 매년 ‘동북아 평화연대 가나자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다. 또 12월에는 예산군뿐만 아니라 한국 전역의 초·
진행·정리 김관원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한·일 양국 전문가 초청 국제 학술회의 "'동아시아' 범주 확대하여 중층적 교류로 경계를 넘자"
연구소 소식 한·일 양국 전문가 초청 국제 학술회의 "'동아시아' 범주 확대하여 중층적 교류로 경계를 넘자" 2015년 11월 19일 재단은 한국정치외교사학회(회장 김영명 한림대 교수)와 공동으로 “한일관계의 제문제와 동북아 역사 화해” 주제 하에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이번 학술회의에는 한국의 한상일 교수(국민대), 이윤상 교수(창원대)를 비롯해 일본의 히라노 겐이치로(平野健一郎) 도쿄(東京)대학 명예교수 등 40여 명이 참가하였다. 총 3부로 나눠 진행한 이날 회의에서는 한·일 간 경제관계의 역사적 전개, 현재 한·일 양국 간 쟁점과 위상, 역사 화해와 교류 협력 사례, 동북아 다자간 협력 추세와 한·일의 지역 구상 등을 소주제로 한 논문 9편을 발표하였으며, 참석자들의 열띤 토론이 이뤄졌다.동아시아 역사 화해를 위한 협력 방안 심층 토론먼저 오전 회의에서 현재 일본학계를 대표하는 원로 학자 히라노 겐이치로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전망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론’이라는 기조연설에서 과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가려면 한국과 중국에 대한 일본의 역사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히라노 교수는 또 전후 일본 대학에서 군사적 안전보장론에 대항하는 안전 보장 방안을 탐구해 왔지만, 현실에서 결국 국가들은 과거 역사에서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든다는 심정을 토로하였다.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동아시아’라는 범주에는 한·중·일 3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북미, 오스트레일리아가 포함되어 있다면서, 국가뿐 아니라 복수의 여러 집단, 계층, 민족 등이 중첩된 중층적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해 여러 주체가 벌이는 다종다양한 활동을 통해 경계를 넘어 종횡으로 교류하는 사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결론 부분에서 히라노 교수는 앞으로 일본 지식인이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사고 틀로 한국 지식인과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와 연대하여 힘을 키우면 역사인식 문제에 대처할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전망하였다.이어서 제1부에서는 ‘한·일
글 김현철 (정책기획실 실장)
을사늑약 강제로 시작한 日 제국주의 침략 재고찰
연구소 소식 을사늑약 강제로 시작한 日 제국주의 침략 재고찰 ▲ 김영호 세계지식인성명 공동 대표          ▲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재단은 2015년 11월 20일, 을사늑약 110년을 맞아 그 세계사적 의미를 조망하기 위한 국제 학술회의를 한국역사연구원과 함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했다.을사늑약 110년인 올해는 시모노세키조약 120주년, 포츠머스조약 1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청일전쟁(1894~1895) 후 한반도에는 러·일 공동보호체제가 형성되었고, 러일전쟁(1904~1905) 후에는 일본의 단독보호체제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과정은 한반도에서 발발한 두 차례 전쟁과 연계하여 비교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을사늑약의 폭력성과 불법성을 밝히고 제국주의 열강이 방조하고 묵인한 끝에 한반도에서 침략국의 폭력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을사늑약의 역사화 작업은 중요하다.1부 이종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부 반병률 교수 사회로 진행한 학술회의의 대요를 살펴보면, 우선 지난 을사늑약 100년 때 학술회의의 주요 논제였던 을사늑약의 불법성, 강제성, 무효론의 연장선에서 역사 사례들을 비교 연구하고 실증하는 작업이 다양해지고 또 심화되었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을사늑약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이 더 이상 학문적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학문적으로 더 이상 을사늑약 합법성 주장 어려워일본의 사사카와 노리가쓰(笹川紀勝) 명예교수는 일본 침략으로 한국 국민이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안중근 의사의 저항 논리에 주목했다. 이는 1905년 조약이 일본이 한국에 강제하여 체결되었기 때문에 불법이고 유효하지 않다는 안중근 의사의 국제법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의병장으로서 전투 상태에서 공적인 권위로 행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또 이번 학술회의를 기획한 이태진 명예교수의 ‘1919년 파리 대표부의 병합무효론’은 을사늑약의 연구 지평을 1920~1930년대까지 확
글 김원수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중국과 일본에 관한 다산 정약용의 생각
역사인물 중국과 일본에 관한 다산 정약용의 생각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다산이 연암 박지원처럼 중국에 다녀왔다면 엄청난 저서를 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다산은 비록 중국·일본 등지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동북아 정세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1799년 겨울, 다산의 가까운 친구 한치응(韓致應) 교리(校理)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다. 당시 북경으로 가는 사신은 판서급 이상인 정사(正使), 참판급 이상인 부사(副使), 정4품~6품인 기록관(記錄官) 이렇게 세 명으로 구성하였는데, 기록관이 바로 서장관이었다. 서장관이라는 직책을 받고 문명 국가인 중국에 간다는 생각에 우쭐했을 한치응에게, 다산은 송별사 한 편을 지어 주었으니 바로 ‘송한교리사연서(送韓校理使燕序)’다.“대체로 해가 정수리 위에 있을 때를 정오(正午)라고 한다. 그러나 정오를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같으면 자기가 서 있는 곳이 동서의 중앙임을 알게 된다. ··· 이미 동서남북의 중앙을 얻었으면 어디를 가도 중국이 아닌 나라가 없는데 왜 ‘동국(東國)’이라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미 어디를 가도 중국이라면 왜 별도로 ‘중국(中國)’이라고 한단 말인가.”천문지식에 근거하여 중화주의를 경계하다숭명사상(崇明思想)과 중화주의(中華主義)에 찌들어 있던 당시에 코페르니쿠스 같은 발상전환을 엿볼 수 있다. 중국(中國), 즉 세계의 중심 국가라는 이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바라보는 지점과 각도에 따라 어디나 중심인데 왜 중국만 중심이라 하느냐고 말하고 있다. 실로 조선인으로서 당당한 주체성을 지닌 태도라 할 수 있는데, 그 배경에는 천문지리에 관한 선진 지식이 있었다.또, 요순의 정치와 공맹(孔孟)의 학문이 중국에만 있을 때와 달리 정치와 학문이 모두 조선에 전래되어 더 높은 수준으로 꽃을 피웠는데 왜 중국 가는 일이 자랑스럽냐고 반박까지 했다. 그러면서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생활에 편리한 기술이 그 곳에 있을 뿐이니, 북경에 가서 그것
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중국의 변경 연구》 중국 변강 연구사업의 현황과 시사점
재단 새 책 《중국의 변경 연구》 중국 변강 연구사업의 현황과 시사점 《중국의 변경 연구》동북아역사재단│20142003년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중국 학계 일각에서 추진하는 ‘동북공정’에 관심이 커졌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 나온 동북공정 관련 연구 양은 상당히 많지만, 그 연구들은 일부 분야나 영역에 치우쳐 있다. ‘동북공정’에 관해서는 역사학계 외 정치학계 등 사회과학 쪽의 관심은 매우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 역사학계나 지리학계에서 ‘동북공정’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다른 공정들을 다룬 경우는 매우 적었다. 《중국의 변경 연구》는 중국 변강학계가 추진한 변강 연구 사업에 관한 종합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중국은 현재 14개 국가와 육지 국경을 맞대고 있고, 6개 국가와 해양 경계를 나누고 있다. 또한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은 대부분 중국에서 ‘변강’이라고 일컫는 변경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중국의 국가 발전전략과 미래 구상에서 변강과 민족문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핵심 문제다. 중국 학계에서는 변경 문제에 대한 국책 연구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변강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설정하여 그것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2002년 ‘동북공정’을 시작한 후 중국에서 추진한 중국 변강 연구학계의 중대 연구 과제는 5개로 ‘동북공정’과 ‘신장항목’, 서남항목, 시짱항목, 북강항목 등이다. 2010년 1월 북강항목이 출범하면서 중국 변강학계는 중국 내 육지 변경지대 전체를 포괄하는 변강 연구사업 클러스터를 완성하였다. 동북공정은 중국 동북지역을, 신장항목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을, 서남항목은 윈난과 구이저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남지역을, 시짱항목은 티베트를, 북강항목은 내몽골을 중심으로 한 북부 변경지역을 다룬다.중국 5개 변강 연구에 관한 첫 종합 조사 결과중국에서 5개 중대 변강 연구사업은 조금씩 시차를 두고 추진 중이다. 2004년 무렵부터 양두 체제로 진행하던 변강 연구사업은 2008년 이후 서남, 티베트, 북부 변강까지 확대되었다. 이들 변경 연구사업군은 변강 소수민족 지구를 안정시키고 국경 문제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글 박장배 (정책기획실 기획팀장)
13도 창의군 기념비 추위도 두려움도 잊은 민중들의 항일 의지
현장보고 13도 창의군 기념비 추위도 두려움도 잊은 민중들의 항일 의지 ▲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13도 창의군 기념탑’ (이미지 제공 : 독립기념관)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반포로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인 이른바 ‘을미의병’은 고종의 권고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조인과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은 제2차 항일의병이 거병하도록 재촉하였으니, 경북 구미 출신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1907년 정미7조약 강제 체결 후 경기, 강원, 충청, 황해 등지에서 의병들이 항일 투쟁을 재개했고, 이 와중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 명령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군인들까지 참여하면서 정미의병 전력이 매우 커진 상태였다. 경기도 연천과 적성 등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의병장 허위와 원주의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은, 힘을 모아 연합 부대를 만든 뒤 서울로 진격하자는 내용을 담은 격문을 전국 각지 의병들에게 발송하였다.이후 전국에서 경기도 양주로 속속 모여든 의병이 총 48진,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회의를 통해 13도 창의군(倡義軍)의 총대장으로 이인영, 군사장으로 허위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허위가 이끄는 선발대 3백 명은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기에 이르렀다.▲ 의병장 왕산 허위그러나 하늘의 도움은 거기까지였을까. 후발 본진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급거 귀향했고, 이미 누설된 서울 진공계획 작전에 만반의 대비를 하던 일제의 공격을 이기지 못한 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이후 흩어진 의병들은 부대 단위로 독자 항전을 벌였으며, 허위 의병장도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서 항일전을 이어갔으나 1908년 6월 결국 일제에 체포당했다. 장군은 체포 후에도 항일투쟁이 정당함을 거듭 주장하며 의기를 굽히지 않다가 사형을 언도받고 그해 9월 서대문교도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1962년 정부는 허위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종로6가에서 청량리까지의 6차선 도로를 선생의 호를
낙성대가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이라고요?
현장보고 낙성대가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이라고요? 사당동에 사는 할머니 댁을 갈 때마다 늘 낙성대역을 지나갑니다. 우습게도 저는 몇 년 전까지 낙성대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낙성대가 무슨 대학교냐고 아빠께 여쭈어 보았죠. 헌데 대학교가 아니라 유적지였습니다!낙성대는 우리나라를 구한 3대 영웅 중 하나로 꼽히는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낙성(落星)’은 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이곳에 사당인 안국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강감찬 장군은 우리가 잘 아는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침략을 막았지요. 고마운 마음에 고려 백성들은 장군의 공을 기려 삼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나중에 그 탑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낙성대로 옮겨 사당 앞에 모셨다고 합니다.낙성대를 방문해서 처음 안 것은 강감찬 장군이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뛰어난 장수인 동시에 지적으로도 본받을 만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낙성대 뒤로는 관악산 등산로가 있고, 서울 둘레길 중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바깥바람도 쐬고 강감찬 장군의 사당도 구경하러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낙성대공원이 공사 중이라 지나다니기가 조금 불편할 것 같네요.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데도 그동안 관심 없이 지내온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조선사는 잘 알지만 고려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해서요.곧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려 하는데, 이번 방문을 계기로 마음을 새롭게 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나은비 (경기 안양시 평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