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재단에서 열린 "동아시아의 해양사 국제학술워크숍" 행사에서는 해양사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동아시아사를 해양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해양사 연구의 위상과 성과를 알아보았다. 이 행사에 참여한 에노모토 와타루 교수를 재단의 이정일 연구위원이 만났다. 두 연구자는 동아시아 세계론의 개념과 유효성,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해양사 관련 연구 동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 편집자 주
에노모토 와타루(榎本渉) 준교수
도쿄(東京)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조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국제일본문화센터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 주제는 9~14세기 아시아 교류사이며, 주요 저서로는 《동아시아 해역과 일중교류-9~14세기 (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9~14世紀)》, 《승려와 해상들의 동중국해 (僧侶と海商たちの東シナ海)》, 《남송, 원대 일중도항 승전기집성-에도시대의 승전집적 과정에 관한 연구 (南宋元代日中渡航僧伝記集成-附江戸時代における僧伝集積過程の研究)》 등이 있다.
이정일 일본에서 전후 보상을 위한 시민운동을 하고 계신데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가나자와(金澤)는 일본에서 '보수천국'으로 불리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또 가나자와는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暗葬地)'가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현재 가나자와에서 전개되고 있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활동에 관해 설명해 달라.
에노모토 와타루 1980년대 이후 일본사 연구에 관해 말하자면 우선 해양사(일본에서는 대외관계사, 해역사 등으로도 불린다)에 관한 연구 성과가 다수 나왔고, 현재는 이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역사 사실과 현상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외래문화가 문학, 미술, 종교 분야에 미친 영향에 관한 검증과 연구가 활발하다. 이렇게 일본 학계에서 이 분야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뤄진 배경에는 한 나라 역사관의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자발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시스템론이나 국민국가론 등에 나타나는 경향과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일본사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사, 중국사, 동남아시아사 연구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역사 전개에 관한 국제적 계약에 착안한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사 연구에서는 그 경향이 매우 뚜렷하고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중국사 연구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편, 중국 내부의 지역 차이에 관심이 커지면서 지역사 연구도 활발하다. 이 역시 해양사 연구와 마찬가지로 국민국가, 민족전통은 뚜렷하게 구분되고 확정되어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면서 재검토를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정일 포괄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동아시아 세계질서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에노모토 와타루 '동아시아'라는 틀이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한, 동아시아 세계질서라는 개념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넓은 범위에서 벌어진 역사 현상을 설명할 경우, 동아시아라는 틀을 절대시하는 것은 한국, 중국, 일본이라는 틀을 고정으로 놓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역사 연구의 가능성을 좁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16~17세기에 행해진 교역을 중심에 놓고 보면 일본 열도는 중국 간쑤성(甘肅省)이나 산시성(山西省) 보다 필리핀, 자바와 거리가 더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특정 지역권을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교역권, 문화권, 정치적, 지배권 등 주제에 맞는 유연한 지역권 설정이 필요하다.
이정일 현재 일본학계에서 동부 유라시아론 등 동아시아 세계론에 관한 논의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가?
에노모토 와타루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나타난 동아시아 세계론은 국가를 초월한 '동아시아 세계'라는 역사적 틀을 제시했고, 한·중·일 세 나라의 개별 역사 전개를 국제 차원에서 논의하는 바탕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 세계론이 유효한지에 관해 때때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아시아 동부에서는 화북, 몽골, 중앙아시아 방면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고, '동아시아 세계'는 꼭 완결된 세계도 아닐 뿐더러세계사에서 보면 차라리 조역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분석하는 데 '동아시아 세계'라는 틀이 과연 충분한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동아시아 세계'라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 유효한 어떤 사실이나 현상도 있겠지만 언제, 무엇에 관한 분석을 하는지에 따라 '동부 유라시아 세계'나 '해역 세계' 등과 같은 별도의 틀을 만들어 임기응변으로 이용하는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당연히 역사를 분석하는 데에는 어떤 이론적 '세계'도 유효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정일 최근 유럽에서 새로운 동아시아 역사와 세계사를 기술하려는 흐름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유럽 학회와 일본 학계의 학술교류 현황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해 달라.
에노모토 와타루 유럽 연구자들이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15세기 이후지만, 사실 직접 접촉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단, 유럽인이 구축한 '세계사'는 우리 동아시아인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할 만한 것도 있고 이질감이 들게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유럽에서 진행하는 동아시아 역사와 세계사 서술 흐름에는 일방적인 반발이나 맹목적 추종에 빠지지 않고 냉정하게 검증하고 흡수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정일 동감한다. 서구 학계의 세계사 또는 지구사 속 동아시아와 구분되는 동아시아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9~14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일본 학계의 새로운 흐름이 있는가? 있다면 설명을 부탁한다.
에노모토 와타루 꼭 '동아시아'에 국한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서 내륙 아시아 세계, 예를 들면 몽골과 티베트 같은 나라의 존재감을 지적하는 연구가 두드러지는 것 같다. 또 당나라와 송이 동아시아 중심이라고 전제하지 않고, 거란(요)·여진(금)·당항(서하)과 같은 나라의 국제적 지위와 위상을 정당하게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점점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이정일 현재 일본학계에서 동아시아 중세사와 관련하여 기성학자들과 구분되는 젊은 학자들의 특징적 연구 주제가 있다면?
에노모토 와타루 근래에는 특히 내륙 아시아와 중국 동북부에 관한 한문 사료와 비(非)한문사료를 병행하여 이용하는 연구가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이정일 두 지역에 관한 연구는 현재 일본 학계뿐 아니라 동아시아사 전반에서 학술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비한문사료는 어떤 내용이며, 어떤 언어로 기록된 원 사료인지 궁금하다.
에노모토 와타루 비한문사료 연구 중에는 위구르 문자, 파스파 문자를 이용한 연구도 활발하지만, 특히 만주 문자로 쓰인 자료가 아주 방대하다. 청나라 시기 관문서는 한자·만주 문자·몽골 문자로 작성되었지만 그동안 연구자들이 주로 이용한 것은 한자 자료였다. 그러나 특히 만주 문자로 쓰인 문서나 비문은 현재도 아주 많은 양이 남아있으며, 최근에는 이런 자료를 활용하는 연구가 늘면서 관련 분야에서 많은 성과가 나오고 있다.
이정일 동아시아 해양사 연구는 일본 학계가 이끌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앞으로 한국, 중국 학계를 위해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에노모토 와타루 1980년대 후 일본 해양사 연구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꼽자면, 과거 일본인의 해외 발전상을 증명한다는 식인 국가주의 시각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편협한 자국민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 이 시기 전 연구들은 1930~1940년대에도 식민지주의, 대외팽창주의 관점에서 해양사 연구를 장려하였고, 많은 연구 성과를 발표한 사례가 있다. 거기에는 지금도 참고할 수 있을 만한 수준 높은 연구가 들어 있지만, 당시 국가가 대외 침략에 이용한 연구 사례도 적지 않다. 해양사는 연구 주제의 특성상 학문 세계에 새로운 시점 형성을 하도록 자극을 줌으로써 사람들의 시야를 열어줄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한편으로는 정치 목적을 위해 실증성이라는 학문의 본령을 벗어나 이용당하기 쉬운 요소도 있다. 한·중·일 어디에서든지, 연구자들은 이런 점을 깊이 자각하고, 이를 강하게 경계해야 한다.
이정일 현재 진행 중인 연구를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에노모토 와타루 9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동중국해 교류 양상을 연구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주로 무역과 문화 교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시대는 한반도에서는 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에 해당하고, 중국은 당나라 말에서 원나라 대에 속하며, 일본에서는 평안·가마쿠라(鎌倉)·남북조시대에 해당하는, 전후시대에 비해 해상을 통한 민간교류가 매우 활발한 시기였다. 이와 연관된 연구는 이전까지 했던 국가 중심 외교사 연구와는 크게 다른 역사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정일 현재 속해 있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조직, 네트워크, 연구 주제는 무엇인가?
에노모토 와타루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는 일본 문화에 관해 연구하는 기관이다. 전임교원은 모두 30명 정도고, 연구 주제는 역사학, 문학, 철학, 미술, 국제정치, 민속학, 대중문화(pop culture)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또 각 분야에서 앞서가는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국제'라는 기관명에서도 알 수 있듯 오직 일본에서만 논의되는 연구를 피하고 다양한 나라와 지역에서 연구자를 초청하여 활동에 참여하게 하면서, 동시에 공동 연구도 진행하여 일본 문화를 세계인의 눈으로 검토하고자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는 매년 외국인 연구원 15명을 초청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유럽, 중국, 대만,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을 비롯하여 한국의 연구자도 많다.
이정일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와 동북아역사재단의 학술교류 또는 협력에 관한 전망, 그리고 앞으로 두 기관이 어떻게 교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에노모토 와타루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는 해외 연구자 여러분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주로 연구자 개인 차원에서 국제연구협력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현재는 해외 연구기관과 관계 구축을 지속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 연구를 이끌어가는 동북아역사재단과의 교류와 협력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