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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호 뉴스레터
중국 연구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역할
기고 중국 연구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역할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늘 1988년에 나온 클라크 소렌센(Clark Sorensen)의 유명한 책 제목이 떠오른다. 《산 너머 산(Over the Mountains are Mountains)》으로 번역할 수 있는 그의 책은 1970~1980년대 산업화에 따른 우리나라 농촌 현실을 잘 파악한 명저 중 하나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자국을 둘러싼 국제 정치 환경 때문에 늘 어렵고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한반도 주변 상황을 고려할 때, 최근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야말로 한반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진부한 느낌마저 드는 동북공정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북한의 핵 문제나 통일 문제를 언급할 때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오히려 중국의 역할이 훨씬 더 커졌다는 생각은 굳이 필자만의 견해가 아닐 것이다. 이는 중국과의 오랜 단절기간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근래 중국의 위상을 부정할 방법이 없는 게 한반도를 둘러싼 현재 상황이다. 이런 탓에 크게는 정치·경제 문제를 비롯해 시시콜콜한 중국 관련 뉴스가 늘 우리 귓전을 때리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의 실상을 알기 위한 노력은 제한적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중국 관련 연구는 신생 학문이라고 말하는 게 과장일까?중국사 연구자로서 내가 이전 중국사 관련 논문을 읽다보면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전에는 중국에서 나온 책을 직접 구해서 읽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교 정상화로 자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국내 중국 연구자들은 중국과 수교를 환영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제한이라는 장벽이 없어지고, 여기에 더해 정보 기술이 발달하여 이제는 연구실에 앉아서 중국
글 정철웅 (명지대 교수, 재단 자문위원)
"연구 성과, 학문적 실증 아닌 정치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 경계를"
인터뷰 "연구 성과, 학문적 실증 아닌 정치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 경계를" 지난 8월 재단에서 열린 “동아시아의 해양사 국제학술워크숍” 행사에서는 해양사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동아시아사를 해양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해양사 연구의 위상과 성과를 알아보았다. 이 행사에 참여한 에노모토 와타루 교수를 재단의 이정일 연구위원이 만났다. 두 연구자는 동아시아 세계론의 개념과 유효성,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해양사 관련 연구 동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 편집자 주에노모토 와타루(榎本渉) 준교수도쿄(東京)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조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국제일본문화센터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구 주제는 9~14세기 아시아 교류사이며, 주요 저서로는 《동아시아 해역과 일중교류-9~14세기 (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9~14世紀)》, 《승려와 해상들의 동중국해 (僧侶と海商たちの東シナ海)》, 《남송, 원대 일중도항 승전기집성-에도시대의 승전집적 과정에 관한 연구 (南宋元代日中渡航僧伝記集成-附江戸時代における僧伝集積過程の研究)》 등이 있다.이정일 20세기 이후 일본 학계의 동아시아 연구는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 30년간, 동아시아의 중세 연구 경향이나 과제, 전망 등을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에노모토 와타루 1980년대 이후 일본사 연구에 관해 말하자면 우선 해양사(일본에서는 대외관계사, 해역사 등으로도 불린다)에 관한 연구 성과가 다수 나왔고, 현재는 이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역사 사실과 현상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외래문화가 문학, 미술, 종교 분야에 미친 영향에 관한 검증과 연구가 활발하다. 이렇게 일본 학계에서 이 분야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뤄진 배경에는 한 나라 역사관의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자발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 시스템론이나 국민국가론 등에 나타나는 경향과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흐름은 일본사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사, 중국사, 동남아시아사 연구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역사 전개에
진행·정리 이정일 (정책기획실 연구위원)
2015년 검정통과 일본 교과서 심층 분석 학술회의 일본 교과서 속 왜곡된 역사 인식이 보내는 경고
연구소 소식 2015년 검정통과 일본 교과서 심층 분석 학술회의 일본 교과서 속 왜곡된 역사 인식이 보내는 경고 지난 4월 6일 일본 정부는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를 발표했다. 사회과 교과서 18종(역사 8, 지리 4, 공민 6)이 검정을 통과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기술이 확산되었다.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관한 해석 등 고대부터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왜곡하거나 오해를 가져올 소지가 있는 기술 문제도 재연되었다. 그리고 역사 왜곡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이쿠호샤(育鵬社) 역사교과서가 오사카(大阪)시, 요코하마(横浜)시에서 채택되는 등 채택률이 2011년 3.75%에서 6.3%로 증가했다.재단은 지난 8월 30일 일본 교과서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2015년도에 검정을 통과한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들어 있는 한국사 관련 기술의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학술회의를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와 공동으로 개최했다.교과서를 벗어나 확산되고 있는 역사 왜곡주요 발표 내용을 보면, 먼저 다카시마 노부요시(高嶋伸欣) 류큐(琉球)대학 명예교수는 아베 정권의 교육 정책과 관련하여 “아베 정권이 추진한 도덕과목을 정규 교과로 만드는 정책이 늦어지는 등 관료들의 저항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군‘위안부’를 기술한 마나비샤 교과서는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사립학교에서 채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근우(부경대 교수)는 지유샤(自由社)와 이쿠호샤를 사례로 들어 “교과서는 검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제약을 받지만, 교사용 지도서는 출판사가 자율 발간하기 때문에 교과서보다 노골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앞으로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사용 지도서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는 점에 참석자들이 공감했다.구체적인 교과서 기술 내용에 관해 서보경(고려대 교수)은 “일본 교과서는 중국을 중심에 두고 책봉체제라는 구조 속에서 왜국이 가야를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고대사상(像)을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논리 체
글 남상구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1930년대 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와 독립운동의 현장
기고 1930년대 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와 독립운동의 현장 지난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학 한국연구중심에서 열린 한·중 국제학술회의 “일제의 침략과 한·중의 공동항전”에 참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였다.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한·중의 항일투쟁 노력이번 학술회의는 단국대 한시준 동양학연구원장과 스위안화(石源華) 푸단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하고, 필자를 비롯한 한·중 학자 각 5명이 주제 발표하고 토론하는 일정으로 진행하였다. 중국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중 공동 항일투쟁이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국 역시 항일전쟁에서 일본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상이 한국과 일본, 구미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였다.필자는 ‘일본의 9·18사변 도발과 중국 동북(만주) 지역에서 한·중 공동항전’을 발표하였다.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침략한 뒤, 그곳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 국민당 계열 중국 의용군, 중국 공산당 계열 항일유격대와 힘을 합쳐 일제 침략세력에 항전하여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강조했다. 필자의 발표에 지정 토론을 맡은 푸단대 푸더화(傅德華) 교수는 한국인들의 의미 있는 독립운동이 외국 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한·중 양국 학계가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전쟁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여 국내외에 그 실상을 올바로 알려야 한다고 역설했다.양지선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는 ‘7·7사변과 한중 공동항전의 한 양상’을 발표했는데,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중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일방적 시혜가 아닌 호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여 주목을 끌었다.학술회의 전후인 8월 28일과 3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역사 현장 답사는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재개관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현재 상하이에 남아있는 푸칭리(
글 장세윤 (독도연구소 2팀장)
안창호, '갈등 대립'에서 '상호 공존'으로
역사인물 안창호, '갈등 대립'에서 '상호 공존'으로 1910년 ‘근대’와 ‘문명’을 앞세운 일제가 동아시아를 침략하고 급기야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직전 안창호와 신민회 회원들은 국외로 망명하였다. 한국민은 압록강 너머 서간도 지역과 두만강 너머 북간도, 그리고 현재의 동북 3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우수리강 너머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 전역과 흑룡강 너머의 러시아 오지 깊숙한 곳까지 이주하여 한인촌을 이루었다. 생존을 위해 집단을 이루었던 한인들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서양인들에 의해 ‘극동’지역으로 일컬어지는 연해주 일대는 강제 병합 이전부터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렇기에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哈爾濱) 의거를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에서 모의할 수 있었다. 안중근 의거 후 신민회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국권회복운동을 접고 독립전쟁론을 최고 구국전략으로 채택했다.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무관학교를 설립, 사관을 양성해 일제에 장기적으로 항쟁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북만주 밀산(密山) 지역의 봉밀산(蜂蜜山) 토지개척은 재미한인사회와 재만한인, 그리고 재러한인사회가 참여한 첫 투자 개척사업이었다. 봉밀산 기지의 개척사업에는 500호 정도가 세 곳에 한인촌을 건설해 농토를 개발하고 학교를 세워 개척촌을 이루었으나 농업 투자사업은 여러 가지 장애로 실패하고 말았다.한인단체부터 회사와 학교까지 설립한 ‘조직의 달인’도산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을 들었다.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했던 도산은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하고 목릉에 거주하는 안중근 가족을 돌아본 후 유럽을 경유해 그해 9월 2일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까지 도산은 동아시아, 즉 만주와 중국 관내,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과 연락망을 구축하고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조직 단체만이 아니라 각종 회사와 학교를 설립해 운영한 조직의 달인이었다.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
글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쿠릴문제 – 역사, 법, 정책 그리고 경제》 "쿠릴열도는 러시아 땅" 주장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저술
재단 새 책 《쿠릴문제 – 역사, 법, 정책 그리고 경제》 "쿠릴열도는 러시아 땅" 주장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저술 이 책은 러시아의 보리스 이바노비치 트카첸코(Борис Ивано вич Ткаченко)가 2009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의 네벨스코이(Невельской)해양대학교에서 발간한 책 “Курильская проблема: история, право, политика и экономика” 을 완역하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쿠릴문제 - 역사, 법, 정책 그리고 경제》로 출판한 것이다.▲ 보리스 이바노비치 트카첸코현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동방민족 역사, 고고학, 민속학연구소에 재직 중인 트카첸코는 러·중, 러·일 국경문제에 관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이 책 역시 국경문제와 관련하여 그가 저술한 연구 업적 중 하나다. 독도 문제로 일본의 도전을 받고 있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한 번은 읽어봐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트카첸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쿠릴열도 점령이 전적으로 합법이며, 현 시점에서 쿠릴열도가 지닌 전략적 가치, 막대한 지하자원과 수자원 등을 고려할 때 쿠릴열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토 주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기본 관점에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객관적 서술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진지하고 흥미로우면서도 대부분 객관적인 논리 전개로 러·일의 영토문제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고, 실제 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독자를 설득하는 꼼꼼한 자료 수집과 치밀한 분석제1부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은 크게 두 가지 논거에서 그들 스스로 북방영토라고 부르는 쿠나시르(Кунашир), 이투루프(Итуруп), 시코탄(Шикотан), 하보마이(Хабомай) 등 4개 섬에 영유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역사적으로 이 북방영토를 최초로 발견하고 그 지역을 먼저 실효지배한 국가가 일본이다. 이런 일본의 권리는 1855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체결한 시모다(下田) 조약에 따라 국제법상으로도 확인되었으며,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러·일 양국 국경문제가 확정되
글 김종헌 (고려대 역사연구소 교수)
덕수궁 중명전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에 내리쬐는 가을햇살
현장보고 덕수궁 중명전 대한제국 비운의 현장에 내리쬐는 가을햇살 ▲ 2010년 복원한 덕수궁 중명전덕수궁 돌담길을 오른편에 두고 정동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정동극장 골목 안에서 아담한 2층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덕수궁 중명전이다. 지금은 덕수궁과 따로 떨어져 있지만, 중명전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1897년만 해도 이곳은 덕수궁(당시 경운궁) 경내였고,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리던 황실도서관이었다.수옥헌이 중명전(重明殿)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난 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설계한 이 건물은 근대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고 했던 고종의 의지가 담긴 곳이기도 했다.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탈하려는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한 1905년, 대한제국에 특사로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1월 9일과 15일, 고종을 알현해 보호조약 인허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1월 17일 오후, 일본군이 궁궐 안팎을 에워싼 가운데 중명전에서 어전회의가 열렸고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해 끝까지 조약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끌려 나간 18일 새벽, 결국 을사늑약은 일방적으로 체결되고 말았다.이날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민영환과 조병세 등 일부 대신들은 자결로 항의를 표시하였고 전국에서 유생과 의병들이 항일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일제는 이듬해인 1906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면서 대한제국의 국운은 점점 기울었다.▲ 1906년의 중명전 모습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하지만 고종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다. 을사늑약이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잃어버린 주권을 찾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이다. 1907년 4월, 고종은 비밀리에 특사로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을 임명하고 중명전에서 위임장을 전달했다. 3개월 후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끝내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을사늑약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알리려는 외교 노력만큼은 세계 언론이 주목하였다.헤이
건원릉에서 깨달은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지혜
현장보고 건원릉에서 깨달은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지혜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내게 왕릉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단골 소풍 장소였다. 당시만 해도 왕릉은 능침 공간까지 관람이 가능해서 늘 정자각까지 잔디밭을 미끄럼 타듯 타고 내려왔다. 그래서 오랫동안 모든 왕릉의 능침은 잔디로 덮여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봉분이 억새로 되어있는 능이 있다 하여 얼마 전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을 찾았다.동구릉 중 한 부분인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단릉(單陵)이다. ‘건원릉’이라는 능호는 ‘조선을 건국한 왕’이라는 뜻으로, 이후 만들어진 조선의 왕릉은 모두 이름을 외자로 지었으나 이성계만큼은 존경의 표시로 능호에 두 글자를 썼다고 한다.원래 이성계는 후비인 신덕왕후 곁에 묻히고 싶었으나, 태종이 그렇게 장사 지내주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고려 부흥 세력이 두려워 이곳 구리시에 능을 조성하고,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기 때문에 봉분이 억새로 덮인 독특한 외관을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능의 아래쪽 중앙에는 태종이 죽은 이성계와 대화하며 넋두리를 하던 배석(拜席)이 있다. 배석을 바라보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효를 다해야 하는데, 많은 자식들은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닫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사도’에서도 그랬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하며, 대화로 서로 믿음을 쌓는 것이 가정을 화목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건원릉 전경▲ 건원릉 배석 
글. 민병덕 (경기 용인시 처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