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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인내와 끈기로 에도 막부 시대를 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 글 윤유숙 (역사연구실 1팀장)
이에야스 초상화
(가노 탄유(狩野探幽) 작품,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센고쿠 시대(15C) 삼걸'로 꼽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두고 일본에는 세 사람의 개성을 빗댄 풍자가 전해온다.

"새의 노래 소리가 듣고 싶은데 울지 않으면 노부나가는 목을 비틀어버리고, 히데요시는 갖가지 방법으로 울게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특정 인물의 정치 행보가 지니는 의미에 천착하는 역사가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이 풍자는 일본인들이 이에야스를 '인내와 끈기'로 최고 권력자 지위에 오른 인물로 기억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에야스는 1542년(또는 1543년) 미카와(三河)(지금의 아이치현)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가문은 히로타다의 아버지 기요야스(松平清康)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스루가국(駿河國, '국'은 일본 고대 율령제 국가의 지방행정구역)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서 원조를 받고 있었고, 미카와의 서부는 오와리국 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의 부친)가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오다 씨와 내통하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켜 히로타다는 1549년 살해당했다. 마쓰다이라 씨가 오다 씨와 손잡을 것을 우려한 이마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씨와 가신들의 영지를 전부 몰수하고 처자를 인질로 잡았다. 이에야스도 이마가와 씨 영지로 호송되어 8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 생활하였다.

독립 센고쿠 다이묘가 되기까지

인질로 십여 년을 보내던 이에야스에게 전기가 찾아온 것은 1560년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였다. 교토 점령을 목표로 스루가에서 수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와 일전을 벌였는데, 노부나가가 이끄는 고작 수천 병력에 참패하면서 본인도 전사한 것이다.

요시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적지를 탈출하여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 인질 신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독립하지 않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미카와 서부에 있는 오다 씨 성채들을 자주 공격하면서 가신들을 앞세워 세력 확장에 몰두하다가 1561년 공식적으로 이마가와 가문에 등을 돌렸다.

1562년 이에야스는 비밀리에 오다 노부나가와 군사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1582년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어, 노부나가는 이에야스를 객장으로 대우했고 이에야스는 동국의 강자인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본거지 미카와의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미카와를 통일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마침내 독립 센고쿠 다이묘 지위를 확립했다. 1566년 성씨를 마쓰다이라에서 세이와(淸和) 겐지(源氏) 계통의 도쿠가와(德川) 씨로 바꿨다.

쇼군 취임 2년 후 이원체제 구축 정권 안정 도모

'강호도전풍(江戸図屏風)'에 묘사된
17세기 전반 에도성

1582년, 혼노지에서 노부나가가 최후를 맞이하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장손 산포시(三法師, 3살)를 후계자로 결정했으나 이는 사실상 자신을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선포한 것을 의미했다.

이 무렵 이에야스는 세력 확장을 거듭하여 스루가, 도오토오미, 미카와 등 세 지역을 장악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와 손잡고 히데요시와 일전을 벌였다. 노부카츠가 겁을 먹고 독자적으로 히데요시에게 굴복하는 바람에 화의를 체결했지만 군사적으로 이에야스가 승리한 전투였다. 이에야스는 결국 히데요시에게 신하로서 예를 취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별격 다이묘로 대우하였다.

1590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근거지를 에도(도쿄)로 옮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다른 다이묘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등 히데요시 휘하에 있던 이른바 무단파 무장을 변호하여 신망을 얻었다. 이는 히데요시 사후 반 이에야스 세력을 제압하고 에도 막부를 설립하는 주요 성공 요인이었다.

히데요시 사후 무단파와 문리파 부장들 간에 갈등이 깊어지자 이에야스는 무단파와 연대하여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충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을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전투 개시 전에 이미 서군 다이묘 상당수를 포섭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부장들의 분열을 십분 이용한 이에야스 정치력의 승리였다.

구노산 동조궁(久能山東照宮)이 보관하고 있는
이에야스의 손자국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반대세력을 제압한 이에야스는 무가 최고직인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었다. 그런데 그는 쇼군 취임 불과 2년 만에 쇼군직을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양위하였다. 히데타다가 다이묘들에게 영지지배권을 하사하도록 하여 그들이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고, 실제 막정은 자신이 장악하는 이원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 권력 이양과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에야스는 지배체제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최고 권력자가 죽고 권력을 이양하게 될 때 정권이 아주 쉽게 붕괴하는 현실을 히데요시 죽음에서 배웠던 것이다.

1614년 이에야스는 강력한 잠재적 정적인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 를 제거하기 위해 오사카 성 공격에 직접 나섰다. 나이 이미 70을 넘긴 때였다. 1615년 마침내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도요토미 씨를 멸족시킨 이에야스는 이듬해 눈을 감았다. 흔히 일본사에서 무로마치 시대 오오닌의 난(1467~77)에서 시작한 전란시대, 내전시대가 1615년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