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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50년 역사 앞에 겸허하자
기고 한·일 50년 역사 앞에 겸허하자 6월 22일은 '한일국교정상화' 조인 50년이 되는 날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이 축하 분위기에서 그동안 쌓아온 선린우호 정신을 다지며 앞으로 50년, 100년을 함께 설계할 좋은 기회다. 하지만 최근 한·일 사이를 흐르는 냉기류는 정치권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서로 호감도가 크게 떨어지는 등 ‘가깝고도 먼 나라’로 역주행하는 안타까운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미래를 함께 열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한국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것을 요구하고, 일본은 ‘부끄러운 과거 지우기’를 집요하리만치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또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 부정적 사례(외무성 홈페이지 개편, 대마도 불상 도난사건, 8개현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 헤이트 스피치, 산케이 보도 파문 등)가 양국 국민감정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여기서 양국의 쟁점 현안 중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첫째, 한국은 1993년 고노 담화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계승을 꾸준히 요구하지만 사실 이에 못지않게 잊어서는 안 될 담화가 있다. 1982년 ‘침략’을 ‘진출’로 표기한 교과서 문제로 빚어진 한·중·일 외교마찰 당시 미야자와(宮澤) 관방장관 담화에 이어 ‘국제이해와 국제협조’라는 근린제국조항을 신설한 바 있다. 지금은 사문화되다시피 한 이 근린제국조항 정신이 살아 있다면 한·일 두 나라가 이토록 불편한 관계로 치닫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역사직시’ 담은 간 나오토 총리 담화의 가치또 2010년 간 나오토(菅直人)총리가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고노 담화는 한국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면서도 한국을 특정하지 않았고,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한 반면 간 담화는 한국만을 특정하고 있으며, 바로 한국이 요구해왔던 ‘역사직시’와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의 표현과 비슷한 맥락으로 “아픔을
글 박정호 (한일의원연맹 사무총장·재단 자문위원)
"'한중일 파트너 관계' 제도화는 미래 동북아 평화공영의 열쇠"
인터뷰 "'한중일 파트너 관계' 제도화는 미래 동북아 평화공영의 열쇠" 아시아의 주도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뜨겁다. 중국은 해상과 육상에서 ‘띠(帶)’로,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망(網)’으로 아시아를 품으려 하고 있다. 지난 4월 14일(화) 재단은 중국이 주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주제로 전문가 세미나를 개최했다. 발표를 위해 재단을 방문한 난징(南京)대학교 수젠중(舒建中) 교수를 차재복 연구위원이 만나 역사 현안, 한·중·일 관계와 미중 관계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_ 편집자 주수젠중(舒建中) 교수난징대학 역사학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난징대학-존스홉킨스대학 중미문화연구센터’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세계역사》, 《세계경제와 정치》, 《사학이론연구》, 《미국연구》 등 정기간행물에 학술 논문 30여 편을 발표하는 등 국제정치경제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자무역체계와 미국의 패권 - GATT제도에 대한 연구》(2009) 《국제경제신질서 - 역사와 현실》(2013), 《클레이턴 - 세계 면왕(綿王)에서 무역투사가 되기까지》(2014) 등이 있다.차재복 한·일 역사 갈등의 중심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있고, 중·일 사이에는 난징대학살(일본은 ‘남경사건’이라고 한다)이 있다. 현지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수젠중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다. 화중(華中)방면 군사령관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와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谷 寿夫) 등이 지휘하던 이 일본군은 난징에서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였고 비무장 일반인(부녀자와 어린이 포함)과 투항 군인들을 무려 6주 동안 살육했다. 1946년 2월 열린 중국 난징군사재판에 따르면 일본군이 저지른 집단학살 규모는 28건 약 19만 명에 이르고, 개별학살도 858건 약 15만 명이다.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난징 학생들과 시민들은 일본군의 만행을 시종일관 강력하게 질타하였고 난징대학살은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반
진행 차재복 연구위원 (정책기획실)      정리 윤선화 중문 에디터
2015년 일본 중학교 검정 교과서 관련 학술회의"일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아베 정권의 정치 도구로 전락"
연구소 소식 2015년 일본 중학교 검정 교과서 관련 학술회의"일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아베 정권의 정치 도구로 전락" 일본은 2011년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지리교과서 4종(전체 4종), 공민교과서 7종(전체 7종), 역사교과서 1종(전체 7종) 등에 독도를 기술했었다. 그런데 2015년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검정 결과를 살펴보면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지리(전체 4종), 공민(전체 6종), 역사 교과서(전체 8종) 모두 독도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일본은 독도를 한·일 양국의 현안으로 자국 중학생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이런 가운데 재단은 일본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대응 긴급 학술회의를 지난 4월 6일 개최했다.이날 회의에서는 “일본의 독도교육과 한국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일본 사회과 교과서의 독도영유권 기술실태를 분석하고, 한국의 독도교육 현황을 살펴본 뒤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재단 연구위원들이 발표자로 참가해 남상구 연구위원이 ‘2015년 일본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검정 결과 검토’를, 곽진오 연구위원이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 교육 현황’, 필자가 ‘일본 문부과학성의 독도 교육과 한국 중학교 독도 교육’을 각각 발표했다. 토론자로는 남경희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한철호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재단 이명찬 연구위원 등이 참여했다.검정통과 18종 모두 독도 기술 포함일본의 ‘학습지도요령’은 문부과학성이 초·중·고등학교 과정 각 교과의 목표와 내용을 고시하는 교육과정의 기준으로, 각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편성할 때 준거 틀이 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2008년 3월 독도 교육을 포함시킨 중학교 ‘학습지도요령’을 고시하였고, 2008년 7월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을 공표하였다. 2009년 3월에는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을 고시하였고, 2009년 12월 ‘학습지도요령해설’을 발표하였다. 독도를 포함시킨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는 2012년 3월 검정을 통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4년 1월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에 독도 관련 내용을 대폭 보강하였다.구체적으로 일본 문부과학성은 지난 2014년 1월 ‘
글 김영수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일제 탄압의 실상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
기고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일제 탄압의 실상 우쓰노미야 다로의 일기 ▲ 우쓰노미야 다로일본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후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이른바 ‘무단통치’를 실시하며 저항세력을 탄압하고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동시에 일본 식민 당국은 자신의 식민지 통치를 선전·미화하고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여러 언론기관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즉 일본어 신문으로 〈경성일보(京城日報)〉, 한국어 신문으로 〈매일신보(每日申報)〉, 영어 신문으로 〈서울 프레스(The Seoul Press)〉를 각각 발행한 것이다. 3개 기관지는 1910년 8월부터 통합과 분리과정을 거쳐 일본의 식민 통치를 선전·홍보하고, 전쟁 동원을 위한 나팔수가 되었으며, 일본의 여러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논조를 폈다.일본 당국이 이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그들의 통치를 합법화한 사례는 많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정부)의 왜곡 주장을 비판반박하기 위해서는 공식 관변자료 외에도 개인의 일기나 편지, 회고록, 증언 등 다양한 자료를 발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좋은 사례로 최근 발굴·공개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가 남긴 일기를 들 수 있다. ‘조선군’ 이란 일본이 식민지 ‘조선’지배를 위해 주둔시킨 일본 육군을 말한다.우쓰노미야 다로는 1861년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현(佐賀縣)에서 태어났다. 1890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한 그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에는 일본 대본영 육군 참모로서, 1905년 러일전쟁 무렵에는 육군 대좌로서 참모본부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1918년 7월 ‘조선군 사령관’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 8월까지 2년 1개월 동안 조선군 사령관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과 함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특히 그는 1919년 3·1운동 탄압 등의 공을 인정받아 그 해 11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듬해 8월 조선군 사령관에서 일본 육군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으로 전직하여 육군참모총장을 꿈꾸기도 하였으나, 192
글 장세윤 (독도연구소 2팀장)
인내와 끈기로 에도 막부 시대를 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사인물 인내와 끈기로 에도 막부 시대를 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이에야스 초상화     (가노 탄유(狩野探幽) 작품, 오사카성 천수각 소장)‘센고쿠 시대(15C) 삼걸’로 꼽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두고 일본에는 세 사람의 개성을 빗댄 풍자가 전해온다.“새의 노래 소리가 듣고 싶은데 울지 않으면 노부나가는 목을 비틀어버리고, 히데요시는 갖가지 방법으로 울게 만들며,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특정 인물의 정치 행보가 지니는 의미에 천착하는 역사가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이 풍자는 일본인들이 이에야스를 ‘인내와 끈기’로 최고 권력자 지위에 오른 인물로 기억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이에야스는 1542년(또는 1543년) 미카와(三河)(지금의 아이치현)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가문은 히로타다의 아버지 기요야스(松平清康)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스루가국(駿河國, ‘국’은 일본 고대 율령제 국가의 지방행정구역)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서 원조를 받고 있었고, 미카와의 서부는 오와리국 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의 부친)가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오다 씨와 내통하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켜 히로타다는 1549년 살해당했다. 마쓰다이라 씨가 오다 씨와 손잡을 것을 우려한 이마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씨와 가신들의 영지를 전부 몰수하고 처자를 인질로 잡았다. 이에야스도 이마가와 씨 영지로 호송되어 8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 생활하였다.독립 센고쿠 다이묘가 되기까지인질로 십여 년을 보내던 이에야스에게 전기가 찾아온 것은 1560년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였다. 교토 점령을 목표로 스루가에서 수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職田信長)와 일전을 벌였는데, 노부나가가 이끄는 고작 수천 병력에 참패하면서 본인도 전사한 것이다.요시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적지를 탈출하여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 인질 신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 후에도
글 윤유숙 (역사연구실 1팀장)
미국지리협회(AAG) 참관과 현지 교섭세계 최대 지리학회에서 부스 운영 독도·동해 홍보 효과 크다
연구소 소식 미국지리협회(AAG) 참관과 현지 교섭세계 최대 지리학회에서 부스 운영 독도·동해 홍보 효과 크다 2015년 미국지리협회(AAG, Association for American Geographers) 연례회의 중 독도영유권 공고화와 동해 표기 확산을 위한 홍보 활동 추진을 위해 지난 4월 20일~26일까지 시카고를 다녀왔다.미국지리협회는 1904년에 설립되어 세계 60개국 1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지리학회로 매년 미국 도시를 순회하며 열리고 있다. 지난해 플로리다주 템파에 이어 올해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렸는데,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논문 5천여 편이 발표되고 전시장 홍보부스 70여 개가 마련되었으며, 7천명이 훨씬 넘는 지리, 일반사회, 경제 분야 대학교수, 연구자,관련 기관 담당자 등이 대거 참석하였다.독도와 동해 명칭에 많은 관심을 보인 학자들학회 발표장 한 쪽에 마련된 홍보전시실은 미국 내 여러 지리학 관련 출판사와 기업들이 연 홍보부스로 가득 차 있었고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해외에서 참가한 기관과 단체들이 연 홍보부스는 자국의 지리와 문화에 관한 정확한 정보 제공(지리, 기후변화, 환경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과 국제사회에 자국의 지리 정보를 정확히 알림으로써 오해를 불식시키고 국제 사회에 자국에 관한 인식과 이해를 도모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활동이었다.재단에서도 홍보부스를 마련하고 부스를 방문한 연구자와 학술회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재단 활동을 소개하였다. 특히 독도와 동해 관련 한국의 주장과 논리를 설명하는 한편 향후 지속적인 교류를 위해 관련 자료를 배포하는 등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기반과 분위기 조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기간 중 배포한 홍보 자료는 △ 지도 및 기타 자료 편집자를 위한 지명의 국제적 표기 지침서(Toponymic Guidelines for Map and Other Editors For International Use Republic of Korea) △ 일본 제국주의의 독도 침탈사(The History of Imperial Japan's Seizure of Dokdo) △ 일본
글 곽진오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6·10 만세운동 기념비와 선창지침체한 민족운동을 소생시킨 청년들의 기개
현장보고 6·10 만세운동 기념비와 선창지침체한 민족운동을 소생시킨 청년들의 기개 ▲ 중앙고 교내 610만세운동 기념비1926년 4월 26일, 조선 왕조 마지막 왕이자 비운의 대한제국 황제였던 순종이 생을 마감하였다. 3·1운동 후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나날이 교묘해지던 일제의 탄압과 주도 세력 간 이념 갈등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과 무장 투쟁이 다소 주춤하던 시기였다.순종의 장례일이 6월 10일로 정해지면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3·1운동에 놀란 일본의 삼엄한 감시망이 학생들에게는 다소 느슨했던 것도 6.10만세운동이 학생 중심으로 전개된 배경 중 하나였다.중앙고보 등 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한 통동(通洞, 지금의 통인동 부근)계 학생들과 연희전문학교 등 전문학교를 주축으로 한 사직동(社稷洞)계 학생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격문을 제작, 인쇄하고 시위를 계획했다.“조선 민중아!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 제국주의의 일본이다.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김성수(金性洙), 최남선(崔南善), 최린(崔麟)▲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당시    중앙고보 재학생     이선호마침내 6월 10일 오전, 순종의 상여가 돈화문을 나서 파조교(지금의 단성사 앞 도로, 당시 개천 위 다리)에 도착하자, 이선호(李先鎬)를 필두로 한 중앙고보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즉시 체포에 나섰으나 시위는 관수교와 을지로, 동대문과 동묘 등지로 시간차를 두고 이어졌고, 이후 일부 지방으로도 퍼졌다.▲ 6·10만세운동 관련기사이날 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체포당한 학생과 청년이 2백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에 달했다. 비록 일제가 군대까지 동원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3·1운동과 같은 전국 규모 독립운동이 되지는 못했지만 침체해 있던 민족운동에 활기를 주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6·10만세운동의 의의는 작지 않다.진학, 취업, 연애 등
'우리 땅 독도'를 마음에 새긴 멋진 여행
현장보고 '우리 땅 독도'를 마음에 새긴 멋진 여행 독도가 일반 관광객에게 공개되기 전 울릉도를 다녀온 적이 있지만 독도를 가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동생이 울릉도 여행길에 독도를 들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아이들과 우연히 들른 독도체험관에서 9만 번째 입장객에게 독도탐방권을 준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찾은 체험관에서 나는 9만 번째 입장객이 되었다. 독도체험관 관계자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이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마침내 독도로 향하던 날. 배를 기다리면서 태극기를 사니 마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러 가는 열사라도 된 것 같았다. 울릉도에서 출발한 배가 두세 시간 항해 끝에 눈앞에 독도가 보이고, 접안할 때 배가 흔들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방송을 들으면서 마음은 어느새 독도 땅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안타깝게도 접안이 어려워서 독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울릉도로 돌아간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아쉽고 아쉬운 마음에 선실 밖으로 나가 독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마음에 담아보려고 애를 썼다. 더 가까이에서 독도를 느끼려 무던히 애를 쓰다가 문득 ‘독도가 내게 다시 오라고 하는가 보다, 다시 찾을 기회를 주려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조금 더 컸을 때 꼭 다시 오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때쯤에는 독도와 울릉도 사이에 혹 심해 터널이 뚫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해보면서···.독도와 울릉도의 무한한 가치에 새삼 놀랐고 무엇보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한 마디 말을 가슴에 새긴 멋진 여행이었다.
글. 김옥자 (경기 남양주시 미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