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보고
6·10 만세운동 기념비와 선창지침체한 민족운동을 소생시킨 청년들의 기개
▲ 중앙고 교내 610만세운동 기념비1926년 4월 26일, 조선 왕조 마지막 왕이자 비운의 대한제국 황제였던 순종이 생을 마감하였다. 3·1운동 후 ‘문화통치’라는 이름으로 나날이 교묘해지던 일제의 탄압과 주도 세력 간 이념 갈등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과 무장 투쟁이 다소 주춤하던 시기였다.순종의 장례일이 6월 10일로 정해지면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3·1운동에 놀란 일본의 삼엄한 감시망이 학생들에게는 다소 느슨했던 것도 6.10만세운동이 학생 중심으로 전개된 배경 중 하나였다.중앙고보 등 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한 통동(通洞, 지금의 통인동 부근)계 학생들과 연희전문학교 등 전문학교를 주축으로 한 사직동(社稷洞)계 학생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격문을 제작, 인쇄하고 시위를 계획했다.“조선 민중아!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 제국주의의 일본이다.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김성수(金性洙), 최남선(崔南善), 최린(崔麟)▲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당시 중앙고보 재학생 이선호마침내 6월 10일 오전, 순종의 상여가 돈화문을 나서 파조교(지금의 단성사 앞 도로, 당시 개천 위 다리)에 도착하자, 이선호(李先鎬)를 필두로 한 중앙고보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즉시 체포에 나섰으나 시위는 관수교와 을지로, 동대문과 동묘 등지로 시간차를 두고 이어졌고, 이후 일부 지방으로도 퍼졌다.▲ 6·10만세운동 관련기사이날 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체포당한 학생과 청년이 2백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에 달했다. 비록 일제가 군대까지 동원하여 탄압하는 바람에 3·1운동과 같은 전국 규모 독립운동이 되지는 못했지만 침체해 있던 민족운동에 활기를 주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6·10만세운동의 의의는 작지 않다.진학, 취업, 연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