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의 공립학교 교과서에 동해를 병기토록 하는 법안이 지난 2월 주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고 3월 6일 교차표결(상원법안은 하원에서, 하원법안은 상원에서의 표결을 거쳐 최종확정)까지 무사히 통과하여 이제 테리 맥콜리프(Terry McAuliffe) 주지사의 서명만을 남겨놓았다. 이 법률이 주지사 서명으로 최종 확정되면 버지니아 주에서는 7월 1일부터 주 교육위원회가 승인하는 모든 교과서에 '일본해(Sea of Japan)'가 언급될 시 '동해(East Sea)'가 함께 소개되어야 한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퇴행적인 역사인식, 독도에 대한 끊임없는 도발로 한일 관계가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번 '동해병기 입법'은 상징성과 의미가 매우 크다.
우선, 미국의 주차원에서 처음으로 동해병기를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간 버지니아 주와 이웃한 메릴랜드 주의 몇몇 카운티에서 수업시간에 동해 명칭을 함께 가르치도록 하는 교사지침서를 채택하거나, 동해가 병기된 교과서와 지도를 구입토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주에서, 그것도 지침이나 규정을 뛰어넘어 법률이 제정된 것은 그 상징성이 카운티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버지니아 주는 우리의 경기도와 같이 미국의 수도권 지역으로 다른 주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또한 버지니아 주에는 세계 각국의 외교관과 특파원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앞으로 각국의 오피니언 리더로 성장하게 될 이들의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동해 명칭을 접하게 되는 효과도 거두게 될 것이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워싱턴 포스트가 이번 일을 여러 차례 보도함으로써 동해 수역의 명칭을 둘러싸고 한·일간에 분쟁이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도 당초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이다.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사소할 수도 있는' 법률 제정과 관련한 내용이 유력 일간지에 수차례 보도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아마도 수도권인 버지니아 주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본이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입법 저지 로비를 벌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심이 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 이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와 독일의 디 벨트(Die Welt)도 관련기사를 게재하였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엔 파워' 덕분에 오히려 동해표기 문제가 부각되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거둔 셈이다.
버지니아주 동포들의 풀뿌리 유권자 운동의 승리
이번 법률은 법안 상정에서 통과에 이르기까지 버지니아 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자체의 풀뿌리 유권자 운동을 통하여 수확한 값진 승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 의미가 크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측면 지원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일본정부의 집요하고도 강력한 반대로비를 극복하고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은 한인사회의 단합된 힘이 그 위력을 발휘한 때문이다. 미국사회 내에서 자리 잡은 우리 동포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인되면서, 뉴욕 주 및 뉴저지 주 의회에서도 동해 병기 법안을 추진하는 확산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버지니아 주의 동해병기 입법은 지난 20여 년 간 우리가 동해 표기 확산을 위해 기울여온 노력의 결과물 가운데 가장 고무적인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과도한 기대를 가지거나 지나치게 낙관론 쪽으로 기우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미 연방정부는 버지니아 주 입법이 이슈화되자 1월 23일 마리 하프 국무부 부대변인의 발언(기자의 질의에 대한 답변 형식이긴 하지만)을 통하여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을 확인함으로써 이번 입법이 자신들의 기존 입장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시하였다. 또한 버지니아 주에서 실체가 확인된 일본대사관(정부)의 동해 병기 저지 로비는 앞으로 미국의 다른 주는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더욱 정교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구사카 스미오(草賀純男) 주뉴욕 총영사가 뉴욕 및 뉴저지 주 의원들에게 동해병기 입법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는 등 이미 일본 측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미의회조사국(CR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이 2월 20일 홈페이지에 게재한 특정 보고서는 최근 몇 년간 작성된 여타보고서에 동해 병기가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일본해가 단독 표기된 지도를 포함시킴으로써 우리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은 여전히 '국제 관행' 고수
우리의 끈질긴 교섭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물론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 주요국 정부들도 '국제적 관행'에 따른다면서 일본해 단독 표기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이들이 현상변경에 소극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정부가 동해병기를 위한 국제적 합의를 도출해 내고자 1992년부터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국제수로기구(IHO: 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총회나 '유엔 지명표준화회의(UNCSGN: UN Conference on the Standardization of Geographical Names)'에서도 다른 회원국들은 한·일 양국 간 협의에 의하여 해결 되어야 할 '정치적 이슈'가 계속 회의 의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점차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국제무대에서 오랜 세월 '일본해' 표기가 누려온 지위를 흔들어 현상을 타파하는 일은 이렇듯 쉽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동해 병기 움직임 확산을 위한 우리의 과제
그렇다면, 버지니아 주 입법으로 동해 병기 확산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이 시점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은 버지니아 주에서의 성공의 동력을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지금 뉴욕 주와 뉴저지 주 의회에서 유사한 입법이 추진되고 있고, 일본은 주 뉴욕총영사가 입법 저지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는 한·일 간에 보다 치열한 다툼이 예상되고, 버지니아 주 입법과정에서 일부 대두되었던 미국 언론들의 비판적인 시각-한·일 간 이슈가 미국 주 의회에서 정치 이슈화되는 양상에 대한 비판-도 확대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우리 동포사회의 더 단단한 결집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뉴욕 및 뉴저지 주에서 또다시 입법에 성공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되겠지만, 실패할 경우 우리의 향후 동해병기 교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도 미리 세워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은 그간 반복된 동해 병기 요청으로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는 교섭 상대국 또는 지도, 교과서 제작사들이 우리의 주장에 계속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신선한' 논거를 꾸준히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참신한 시각에서 동해 표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연구물들을 많이 생산해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유서 깊은 외국 지리학회와의 교류를 통해 실력 있는 학자들을 새로이 소개받고, 이들로부터 측면 지원을 받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동해 병기실적을 계속 늘려나간다면 앞으로의 교섭에서는 그 실적 자체가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동해표기 문제는 지금까지의 교섭 경험에 비추어 결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교섭의 결과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섭에 임하는 사람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언론, 국민들 모두 인내심이 요구된다. 이와 함께 일본이 왜 그토록 '일본해' 단독표기에 집착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일본의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