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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러스크 서한
  • 이명찬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Question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러스크 서한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러스크 서한은 무엇인가?

Answer

미 외교관들의 친일행각과 러스크 서한

러스크 서한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기 직전인 1951년 8월 10일 당시 딘 러스크(Dean Rusk)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가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에게 보낸 편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독도, 다른 이름으로는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으로 불리는 그 섬에 대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키도사 관할 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해(권리를) 주장한적이없다."

일본이 이 러스크 서한을'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국제적 보증으로 읽으면서 오늘날의 '독도문제'가 시작됐다. 러스크 서한 이후 일본의 독도 공세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대일 강화조약 초안 만들기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일본 편을 든 것은 아니다. 특히 독도 귀속문제에 대해 미국은 1949년 말까지'독도는 한국 땅'이란 태도를 명시적으로 견지했다. 한국도 국가 수립 이전인 1947년부터 독도 등 일본에 빼앗겼던 땅과 권리 찾기 작업을 본격화했다.

일본 역시 그해부터 임박한 강화조약 준비태세에 돌입하면서'다케시마'(독도)가 원래 일본 영토임을 선전하기 시작한다. 1947년 6월에 일본 외무성이 펴낸 팸플릿 시리즈 <일본의 부속소도(小島)> 제4권에 독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딘 러스크 차관보 서한에 응축되어 있는 독도에 대한 심각한 대일 편향, 그리고 1949~1951년 주일 미국 정치고문이자 연합군최고사령부 외교국장을 지내면서'독도는 한국땅'이란 미국 정부의 기존 시각을'다케시마는 일본땅'으로 완전히 돌려놓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윌리엄 시볼드 등 주일미국 외교관들의 친일행각이 바로 그 팸플릿 시리즈의 계획적인 날조의 토양이 되었다.

미국의 일본 재건프로그램에 희생된 독도

1947년,' 트루먼독트린'이발표되고미소냉전체제가 굴러가기 시작한 2년 뒤 중국이 공산화하고 또 그 1년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은 그때까지의 징벌적 일본재건 구상을 비징벌적이고 관대한 구상 쪽으로 급선회하면서 신속한 대일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독도문제 해결을 꾀했고, 그것은 사실상 일본 손들어주기로 귀착됐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나 한국의 영토분쟁에 개입하거나 안정시킬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조약에서 제주도와 거문도, 울릉도가 일본 영토에서 배제된다는 내용외에 독도에 대한 어떤 영토규정도 빼버린 채 애매한 중립적 입장을 강조하면서 일본과 한국이 양자회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넘겨버렸다. 그 결과가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현재의 모습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2차 대전의 종결을 의미하는 단순한 전후처리 절차가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도 배제당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전쟁 당사국들끼리의 전면강화가 아니라 사실상 미국-일본 간 단독강화였으며, 반공·반소 냉전체제를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한 미국의'친미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재건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