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리터우 출토 수면(獸面) 동패식(銅牌飾), 김인희 연구위원 제공
전설과 역사의 경계선에 선 하나라
중국 고대 문헌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예컨대 천지개벽 후 처음 태어났다는 반고盤古,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여와女媧, 농사의 신 신농神農(혹은 염제), 문물제도를 정비했다는 황제黃帝, 효의 상징 순舜 임금, 치수를 완수하고 하夏 나라를 창건했다고 알려진 우禹 임금, 하를 멸망시키고 상商 나라를 개창한 성탕成湯,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개창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등 이처럼 많은 인물이 중국 고대 문헌에 보이는 신화 혹은 전설, 역사를 구성한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탓에 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컸다. 대표적인 것이 1920년대부터 중국학계를 휩쓴 ‘의고疑古’ 사조다. 의고 사조를 이끌었던 후스胡適(1891~1961)와 구제강顧頡剛(1893~1980)은 동주東周(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이전의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극단적 인식을 드러내며, 이른바 ‘중화 역사 5천 년’을 반 토막 냈다.
그렇다면 이 역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당시 사람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고고학考古學이다. 1920년대 중반 하버드대에서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리지李濟(1896~1979)는 서구의 고고학적 연구방법론을 도입하여 중국에서 현대적인 발굴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192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인쉬殷墟의 발굴이다. 이를 통해 수많은 갑골문과 상왕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상나라의 존재가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되었고, ‘반 토막’ 났던 중국 역사의 시간적 범위를 10세기 가까이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나라 이전에 있었던 하나라도 고고학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하나라와 우 임금의 만남
하나라는 우 임금이 세운 나라로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우 임금은 아버지 곤鯀을 이어 천하의 치수를 담당했다고 한다. 곤은 식양息壤이라는 흙을 이용하여 둑을 쌓는 방법으로 치수를 했으나, 결국 둑이 무너져 실패했다. 이에 순 임금은 곤의 아들인 우를 등용하여 치수를 맡겼는데, 우는 아버지가 실패한 원인을 찾다가 둑을 쌓는 방법이 아니라 물길을 터는 방법으로 치수를 하여 천하의 홍수를 안정시켰다. 능력을 인정받은 우는 순의 선양禪讓을 받아 마침내 임금의 자리에 올라 양성陽城에 도읍하게 되는데, 이 나라가 바로 하나라다.
그러나 이 전설의 형성 과정을 보면, 우 임금의 이야기와 하나라 이야기는 각기 다른 전승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각 문헌이 기록된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우 임금과 하나라 모두 서주(약 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년)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연관 관계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 임금’은 ‘우 임금’대로, ‘하나라’는 ‘하나라’ 대로 전승 과정을 거쳤지, ‘하나라를 세운 우 임금’이라는 연관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주 시기를 거치며 우 임금은 하나라의 개창자가 되어 있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필자는 치수를 완수한 ‘우’의 영웅성과 중국 최초의 왕조로 설정된 ‘하’의 상징성이 결합된 결과로 생각한다.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우 임금을 선양 시대의 마지막 임금으로 만들었는데, 원래 우 임금은 익益이라는 인물에게 선양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익을 따르지 않고 우의 아들인 계啓를 따랐기 때문에 최초의 세습 왕조가 세워졌다고 설정함으로써, 우 임금의 영웅성을 강조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후대에 기록된 전설에 불과하다. 동시대적인 문자 자료의 발견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한, 하나라는 물론 우 임금의 존재 또한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인쉬의 발굴로 상나라가 역사적으로 공인되었듯이, 학자들 또한 언젠가는 하나라 또한 고고학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덩펑 왕청강과 옌스 얼리터우: 하나라의 고고문화?
그 대표적 학자가 쉬쉬성徐旭生(1888~1976)이다. 그는 하나라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전래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정리한 후 1959년 지금의 허난성 중부 뤄양평원洛陽平原 일대에서 고고 조사를 추진하였다. 이때 조사한 대표적인 유적이 허난 덩펑登峰 왕청강王城崗 유적과 옌스偃師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이다. 그러나 쉬쉬성은 이 유적들이 하나라의 흔적이라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후 지속된 고고 발굴을 통해 많은 학자들이 왕청강은 하나라 초기 우 임금이 도읍했던 ‘양성’으로, 얼리터우 유적은 하나라 중·후기의 도읍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대가 불분명한 하·상·주나라의 연표를 확정하기 위해 추진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1996~2000)’에서 신미新密 신자이新砦 유적을 왕청강과 얼리터우 사이에 추가하여, 하나라의 고고문화 계보를 확정 지었다. 그렇지만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동시대적 문자 자료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중국권 학계는 물론 중국 내에서도 이에 대한 합리적 의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초의 중국’, 하나라일 필요는 있을까?
위의 세 유적 가운데 얼리터우 유적은 계획도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井’자형 도로망과 대형 건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또, 청동기, 터키석 등 여러 공방과 제사 유적을 통해 농업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전문 직업군의 존재도 밝혀졌다. 이는 얼리터우 사회가 이미 어느 정도 성숙한 복합사회complex society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경제와 종교를 장악한 공공 권력의 존재 또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아직 문헌 사료를 포기하지 못한 중국 학자들에게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로 인식케 한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라여야만 하는가? 얼리터우 유적 자체로 보면, 청동기시대 중국에서 확인된 최초의 복합사회 유적으로, 혹자는 이를 ‘가장 이른 시기의 중국Earliest China’으로 인식하고 있고, 혹자는 얼리터우의 엘리트 문화가 주변에 영향을 끼쳐 ‘고급 문화’의 본보기로 만들었다는 ‘문화패권Cultural hegemony’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연구방법론만으로도 충분히 그 문화적 가치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얼리터우 유적이 반드시 하나라의 흔적일 필요는 없다. 중국학계는 고고학을 역사학의 부속물로 여긴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으므로 얼리터우를 하나라와 연결하는 것은 얼리터우 유적의 고고학적 가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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