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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정동 손탁호텔 터독립 염원과 국권 피탈의 명암이 교차하는 근대식 호텔
1900년대 초 손탁호텔
(이미지 제공 : 독립기념관)

서울 중구 정동사거리에서 덕수궁 돌담길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조금 걷다보면 주한 캐나다대사관 맞은편으로 커다란 붉은색 벽돌건물을 만난다. '이화100주년기념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 지하주차장 입구에는 작은 표지석이 하나 있다. '손탁호텔 터'라고 쓰인 이곳이 바로 개화기 서울에 지어진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 있던 자리다.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은 프랑스계 독일인 여성으로 1885년 러시아 초대 공사였던 베베르 가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삼십대 초반에 조선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를 맡았던 손탁은 뛰어난 친화력과 외국어 실력으로 고종과 민비에게 신임을 얻었다. 1895년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에 있는 한옥 한 채를 하사했는데 이곳이 내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급부상하였고, 당시 친미개화 세력의 구심이었던 정동구락부(Chongdong Club)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896년 정동구락부를 모체로 한 독립협회가 공식 발족한 뒤, 1897년 독립관을 건립하기까지 당시 독립협회 주요 인사들은 이곳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손탁빈관(孫澤賓館)'이나 '한성빈관(漢城賓館)'으로 불리던 이 곳은 1902년 2층 벽돌 건물로 신·개축되었으며, 궁내부가 '프라이빗 호텔(일부 예약 손님만 묵을 수 있는 특정 호텔)'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러시아 세력이 위축된 뒤로는 명맥만 유지했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종한 일본의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머물기도 했다.

이렇듯 주요 정치가들의 회합 장소이자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손탁호텔은 1909년 다른 외국인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으며, 손탁도 1909년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1925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손탁호텔은 1917년 건물부지가 이화학당 기숙사로 팔렸다가 1922년 이화학당의 교실과 기숙사, 실험실을 비롯한 각종 부속시설이 딸린 프라이홀(Frey Hall)로 신축되었고,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06년 지금의 이화100주년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개화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자 각종 서양 음식문화를 전파한 출발지라는 명성과 함께 겉보기에는 화려한 서양 문물을 상징했을 이곳이, 실은 한국 근대사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이들과 그들의 행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손탁호텔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유적이다.

자료 참고 : 독립기념관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 손탁호텔 터
http://sajeok.i815.or.kr/ebook/ebookh01/book.html
문화콘텐츠닷컴 - 손탁여사와 손탁호텔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0&cp_code=cp0434&index_id=cp04340057&content_id=cp04340057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