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교들은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지에 있는 학교들과 제휴하여 교류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색다른 관점의 역사인식에 관한 교류가 상당히 많고 유럽 국가들끼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이코 이탈(Heiko Ital) 교수
2008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통번역학과에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0년 독일 필립스-마부르크대학교 정치학, 역사학, 교육학 석사를 수료하였으며, 2001년에는 독일 연방의회 상임위원회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2004년 독일 베를린 주 정치학, 역사학 고등교원자격을 취득한 뒤, 2011년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 박사를 수료했다.
Q 재단은 지난 3월 13일 폴란드와 주변국 간 과거사 문제 해결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의 화해 경험 : 동아시아 화합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를 주제로 세미나를 공동 개최하였다.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가 일본과 한국 관계에 시사하는 점은?
하이코 이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 때문에 독일과 폴란드가 역사화해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 초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1969년까지 서독의 공식 외교정책은 '서유럽으로 통합(western integration)' 이었다. 그러다 첫 번째 사회민주당 독일수상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1969년에 정권을 잡자 독일의 대 폴란드 외교정책은 이른바 '동방정책'으로 바뀌었다.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폴란드인에게 참회했다. 그것이 독일과 폴란드가 역사 화해로 나아가는 시초였다. 이후 지금까지 폴란드와 독일의 관계는 매우 좋다. 몇 주 전, 독일의 외무장관인 슈타인 마이어가 프랑스, 폴란드 외무장관들과 만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독일과 폴란드와의 강화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Q 우리는 독일이 과거사를 사죄하고 지금도 전쟁범죄자를 찾아 벌하는 것처럼 일본도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인들은 이런 말을 어떻게 느낄까 궁금하다.
하이코 이탈 나치 치하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독일은 인류에게 여러 가지 죄를 지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렵고 험난했는데 사실은 아직도 그 과정에 있다. 지난 60년간 추모시설을 건립하고 유대인, 신티(Sinti)족, 로마족, 러시아 포로 등 피해를 입은 여러 집단들에게 사과했다. 독일연방 대통령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가 2014년 3월 그리스를 방문해 피해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사과했다.
어느 국가나 과거사를 인정해야 한다. 많은 독일인과 독일 단체는 일본이 과거사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겪을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지역협력을 위한 프로젝트들이 많은데 독일은 그런 프로젝트들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과거사를 인정하는 과정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이 전쟁 범죄에 대한 화해의 전형이나 모범 사례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국가들이 서로 화해하고 좋은 이웃으로 사는 어려운 과정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북아시아에서 독일의 역할은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에서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Q 2012년 '한독사학논총'에 "왜 일본은 독일하고 달리 역사 교과서에서 자신의 전쟁 범죄를 순화 하는가"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정말 왜 그럴까 궁금하다.
하이코 이탈 역사교육에 관한 논란의 강도가 일본과 독일 사이에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련 논란을 중재할 만한 능력을 가진 공인된 기관이 일본에는 없다는 것이다. 독일의 '게오르그 에케르트 연구소'는 독립 기관으로서 독일 사회 전반과 정부 당국 사이에서 역사인식에 관한 합의를 중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중재 기관이 없고, 일본 시민 사회와 정부당국이 정반대의 역사인식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독일이나 일본 사회 모두 역사교육에서 화해와 상호이해라는 원칙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반대로 일본 정부 당국자들은 역사교육에서 국가가 개인보다 위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애국심 있는 시민 교육'에 더 치중한다. 그래서 '난징 대학살'을 '난징 사건'으로 부르거나 '후소샤(扶桑社)교과서'처럼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여성'(성 노예) 같은 논하기 불편한 전쟁 범죄들을 아예 배제하여, 자국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계속 은폐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 당국자들은 앞서 언급한 목표를 충족하는 교과서들을 선호하는 반면, 이제는 그런 교과서들이 광범하게 배포되는 일을 제약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 시민 차원에서 벌이는 운동도 강력해졌다. 그렇지만 일본에는 공인된 중재 기관이 부재하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관한 논란은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Q 앞에서 '게오르그 에케르트 연구소'를 한 편에서는 역사의식을, 다른 한 편에서는 정부 부처들 사이를 조정할 수 있는 공인된 기관으로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이코 이탈 '게오르그 에케르트 연구소'는 역사와 문화연구를 교과서와 교육용 매체에 응용하는 다양한 학제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또, 독일이나 다른 나라 교육정책 입안자들이나, 교육자, 교육관련 단체들에게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교과서를 둘러싼 국제적인 사안이나 프로젝트들에 참여해 코디네이터나 중재자 역할을 맡기도 한다. '게오르그 에케르트 연구소'에서는 연구, 지식전달 그리고 연구 인프라 관련 서비스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과서와 교육용 매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지원하기도 하는 비(非)대학 기관으로서 해당 분야에서 우수성을 발휘하는 중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세계의 연구자들이 '게오르그 에케르트 연구소'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연구소의 도서관인데 그곳은 세계에 견줄 만한 다른 곳이 없을 정도로 역사, 사회, 종교 관련 서적과, 지리교과서들을 소장하고 있다. 연구소의 정보와 통신을 접할 수 있는 입구역할을 하는 'Edumeres.net'은 교과서와 교육용 매체에 관한 연구 세계에 온라인 상에서 접속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dumeres.net'의 주요 특징은 사용자가 주도하는 교과서 비평을 출판한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장학금을 광범위하게 운용해 교과서와 교과서 연구에 대한 인식을 증대시키고 해당 분야 연구를 진전시키는데 전념하고 있어서 관련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연구에 상도 수여하고 방문학자들을 지원하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2012년에는 교육용 매체 분야에서 우수성을 기리는 차원에서 '올해의 교과서상'을 제정해 매년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상을 주고 있다.
Q 유럽과 같은 역사 화해가 유독 아시아에서 이루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하이코 이탈 미국의 외교정책과 연관이 있다. 연합군,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는 나치 시대를 겪은 독일인의 재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나치가 설치한 집단 수용소에 시민들이 직접 가서 집단 학살 같은 악행의 현장을 보게 했다. 1950~1960년대 나치 전쟁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는데, 독일인 스스로 과거에 저지른 일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미국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달랐다. 원인은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지만, 미국이 일본과 아시아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이다. 18~19세기에 많은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1945년에 미국인들은 독일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와 문화는 미국인들에게 사뭇 낯선 것이었다. 어떻게 일본인을 다뤄야 할지 몰랐다. 미국은 당시 공산주의 중국과 소련에 맞닥뜨렸고 아시아 동북지역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야 했다. 때문에 도쿄 재판의 내용은 매우 빈약했다. 많은 일본 사람들이 일제의 팽창 전쟁에 참여했으나 처벌받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공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없으면 일본은 공산화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상반된 미국의 접근방법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역사화해 과정이 달라지게 된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Q 한·중·일 세 나라가 한창 과거 역사문제로 갈등하고 있다. 제3자로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이코 이탈 한국이나 일본은 중국을 독자적으로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와 군사 측면에서 아시아의 '중견국가'로서 두 나라가 미국과 노선을 같이 하며 공조한다면 영향력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관계는 좋지만, 정치관계에서 성과는 제한적이다. 다만 1990년대부터 미국-일본-남한으로 이뤄진 안보 삼각구도를 통해 '사실상 동맹'을 간접적으로 유지해오고 있다. 역사와 영토에 관한 논란들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은 정치·안보 관계를 구축하는 데 거대한 장애물로 남아 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의 피해자들을 향해 진심으로 회한을 표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한다. 관광, 유학, 결혼을 통해 갈수록 늘고 있는 민간 교류는 미래 한일관계를 밝게 해준다. 양국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흐름을 지원할 의무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이념 분쟁을 막고 상호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실용적인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
Q 지난해 재단이 후원한 '유럽과 아시아 지역 통합을 위한 교환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유럽처럼 동북아 공동체와 같은 통합이 가능할까?
하이코 이탈 예측 가능한 미래 안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유럽식 통합은 없을 것이다. 유럽식 통합의 특징은 경제 통합뿐만 아니라 정치 통합까지 이룬 점이다.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매우 막강한 국가라서 동북아시아의 경제와 정치 통합은 중국과 함께해야만 이룰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결여된 중국 정치체제의 현상(現狀)은 정치적 통합에 대해 생각조차 못하게 한다. 경제 통합만 놓고 보면 한중일 FTA와 같이 협력을 더 강화할 여지가 있어 보이고 이는 세 국가 사이에 정치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 중국에서 개혁이 일어나는 과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Q 한·중·일 사이에 논쟁이 되는 역사 문제를 보면서 제3자로서 한국인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이코 이탈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려고 했던 이유는 한국의 전략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인 과거는 앞서 언급한 역사 교과서 논란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그리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동해 표기 문제 등으로 이어졌다. 제3자가 학문적 시각으로 보면 한국의 공식 입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이 많다.
한·중·일의 정치인들의 노력만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30년간 목격했다. 두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역사 인식을 둘러싼 논란에 관한 국제 학문적 연구를 향상시켜야 한다. 세 국가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제3의 다른 나라 학자들까지도 동북아시아 역사에 관해 합의를 이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이런 어려운 주제를 개인 차원에서 다룰 수 있도록 동아시아·유럽지역 통합 교류 프로그램(EPRIE)과 같은 교류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젊은이들과 미래 지도자들을 교육하고 좋은 이웃으로 성장하는 길을 제시할 것이다. 과거 역사에서 저지른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강력한 시민 사회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접근들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시민 사회를 강화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다.
Q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독일 젊은이들과 한국 젊은이들의 역사인식에 차이가 있다고 보는가?
하이코 이탈 역사적 사안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양국에서 동일하게 높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 학교들은 프랑스, 영국, 폴란드 등지에 있는 학교들과 제휴하여 교류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색다른 관점의 역사인식에 관한 교류가 상당히 많고 유럽 국가들끼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교육부나 동북아역사재단 등이 그런 교류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동북아시아 전체에 이득이 되므로 앞으로 더 확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