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부터 23일까지 6박 7일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제8기 독립정신 답사단'의 부단장으로 40여 명의 대학생과 함께 중국 화북(華北)지방의 항일투쟁 전적지를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중국은 수 십 차례 가보았지만, 화북지방의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항일투쟁의 현장을 답사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 방문한 지역은 한국광복군이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활동한 서안(西安)지역을 제외하면 주로 조선의용대와 그 후신인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등의 좌파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하던 화북지방이었다. 여기에 진시황릉과 흥교사(興敎寺), 대안탑(大雁塔), 용문(龍門)석굴 등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지도 포함되어있고, 북경의 만리장성과 천안문 광장, 자금성까지 보았으니 정말 금상첨화격의 훌륭한 답사코스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첫날 맨 처음 답사지인 서안의 한국광복군 유적지는 막상가보니 얼마 전에 건물이 철거되고 교련장으로 쓰였던 마당과 일부 건물만 남아 있어 당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답사단은 적지 않게 실망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답사단은 이만열 단장과 김영범 부단장, 필자 등의 설명을 듣고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1938년 10월 중국 무한(武漢)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낙양 부근의 맹진현(孟津縣)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그 뒤 이듬해 7월 조선의용군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성립은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을 창건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활동한 지역은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섬서성(陝西省 : 연안 일대)·산서성(山西省 : 좌권현)·하북성(河北省 : 섭현·형태시·원씨현)·하남성(河南省 : 낙양) 등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모두 답사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낙양과 섭현, 원씨현 등에 있는 주요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유적지를 골라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중국 침략은 화북 평원지대까지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진전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태항산맥이 가로막고있는 중국 서북부 산악지대와 황토고원 일대는 중국공산당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으로 일본군의 활동이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조선의용군이 주둔하고 있던 좌권현과 섭현 일대는 수천미터 높이의 기암절벽과 깊은 골짜기가 허다하고,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하천과 좁은 평지로 생존조건이 매우 불리한 곳이었다. 지금도 낙후된 지역으로 물자가 귀한 지역이었다.
필자는 이곳을 답사하고 정말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 특히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항일무장투쟁이 중국공산당 세력의 지원과 협력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설명을 듣고, 발로 확인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선열들은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며 신명을 다바쳐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적극 분투하였던 것이다. 7월 20일에 찾아갔던 섭현(涉縣) 석문촌(石門村)의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묘는 첫눈에 보기에도 정말 자리가 좋아보이는 명당이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상영생(尙榮生) 관장도 그 사실을 강조했다. 21일 찾아간 한단(邯鄲)의 진기로예(晋冀魯豫) 열사능원 역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명당이었으며, 마치 공원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많은 시민들이 산책하거나 운동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서는 1942년 5월 전사한 윤세주·진광화 열사의 묘 위치가 다르고, 봉분의 크기나 설명문이 적힌 묘비 등의 크기와 위상이 달라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진광화 열사는 중국공산당원이고 중국 항일투쟁에도 참가한 적이 있기 때문에 윤세주 열사보다 더 좋은 자리에 더 크고 훌륭하게 모셔져 있었다.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국민정부는 1940년대 전반 우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상당한 지원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 현장을 답사하면서 중국공산당과 그 산하의 팔로군 역시 조선의용군을 진정한 국제주의 전사로서 우대하고 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상당히 후한 대접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국제주의적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이 중국공산당 세력의 지원을 받고, 그들의 보호 하에 활동하고 있었던 사실은 이런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민족과 이념을 초월하여 인류보편적 가치를 갖는 인물과 단체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1일 오후 4시 경 유명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호가장(胡家庄)전투 현장에서는 의미있는 '호가장 보위전 항일열사기념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우리 답사단은 원씨현 현장과 간부들, 그리고 방송 등 언론과 현지 주민들까지 참가하고, 호가장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던 김학철(金學鐵) 선생의 아들인 김해양(金海洋) 님이 멀리 연변에서 참가한 이 기념비 제막식에도 참가하는 행운을 가졌다. 제막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현지 공무원들과 언론, 주민들도 진심으로 환영하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되었다.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점은 1941년 12월 12일 벌어진 호가장전투에서 조선의용대 전사 4명이 희생된 사실은 비교적 알려져 있었지만, 조선의용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팔로군 전사 12명이 희생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중국공산군의 국제주의적 연대와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재평가할 만한 사실이라고 본다.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에는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던 일부 일본인까지 가담하여 중국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싸웠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 민중의 연대투쟁이 성립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항일투쟁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최근 동아시아에는 '민족주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독도와 '위안부' 문제,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센가쿠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로, 또한 중국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는 남중국해의 시샤군도(西沙群島)·난샤군도(南沙群島) 문제로 격렬한 갈등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토분쟁은 하루빨리진정,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의 평화공존과 공영은 불가피하다.
한·중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의 생생한 현장을 답사하면서 한중수교 20주년인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또 역사문제와 현실을 동아시아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