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은 정말 다사다난(多事多難)이었다는 말이 꼭 어울리는 한 해였습니다. 3월에는 북한이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을 격침했고, 11월에는 포격으로 대연평도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군인과 시민이 50여 명이나 원통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인다 하더라도, 북한은 동포로서 차마 할 수 없는 만행(蠻行)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2011년에도 2010년 못지않게 북한의 도발에 대한 우려와 불안과 경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국제정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2010년에는 남북 간의 갈등과 연동하여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한편이 되어 대결하는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일본과 중국은 센카쿠열도를, 러시아와 일본은 남쿠릴열도를 둘러싸고 각각 영유권 다툼을 벌였습니다. 한반도 주변에서 마치 19세기 말과 같이 영토를 대상으로 한 냉전의 기운과 내셔널리즘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것입니다. 아마도 지역 국가 간의 이런 국제분쟁의 양상은 올해에도 나타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험난한 시기일수록 동북아역사재단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우리나라와 주변 여러 나라(隣近諸國) 사이의 역사와 영토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화해와 공영의 동북아시아를 만드는 것을 활동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국과의 공동연구와 상호대화도 빼놓을 수 없는 사업의 하나입니다. 남북 간의 대립이 첨예하고 한반도 주변의 정세가 불길할수록 동북아역사재단의 목표와 활동은 더욱 숭고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불안한 주변 정세, 더욱 절실한 평화와 공영의 가치
현재 지역 내 국가 간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대결은 역사 속에서 쌓여온 편견과 불신에서 야기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신뢰와 화해를 이룩하는 지혜와 교훈도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느냐 마느냐, 영토를 빼앗기느냐 마느냐의 절박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역사 타령이나 한다고 타박할지 모르지만, 국제관계의 긴 흐름에서 볼 때 동북아역사재단이 내건 목표와 활동은 평화롭게 문제를 극복하고 공생(共生)의 길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0년에 동북아역사재단은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하는 업무인 한일관계와 한중관계 또는 독도 영유권 수호와 관련된 자료의 수집과 정리 및 연구에서 큰 성과를 올린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60여 종류의 책을 발간하고 국내외에서 80여 차례의 학술회의를 개최했으니까요. 이런 업적이 앞으로 계속 축적된다면 동북아역사재단은 명실공이 동북아시아 지역연구의 허브로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밖에 특히 눈에 띠는 업적은 일본의 한국병탄(韓國倂呑) 100년을 맞아 벌인 각종 사업입니다. 학술 면에서는, '한국병합조약'의 불법성, 강제성, 무효성을 파헤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미국, 독일 등에서 30여 명의 학자가 참석했습니다. '한국병합조약'과 관련된 자료집을 발간하고, 순회 전시회를 개최한 것도 기억에 남는 활동이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또 한국과 일본의 언론을 비롯한 여론 주도층이 한국병탄의 정확한 의미와 성격을 이해하고 전파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한일 양국의 신문과 방송이 기획하고 제작한 한국병탄 관련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은 동북아역사재단이 후원하거나 조언한 것이었습니다. 한일 양국의 주요 정치인, 언론인, 연구자를 한자리에 모아 한일관계의 과거 100년을 성찰하고 미래 100년을 전망하는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이런 활동은 2010년 8월 10일에 간 나오토 일본총리가 '식민지지배의 강제성'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는 데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을 선발하여 양국의 역사유적지를 탐방하고 대화와 토론을 거듭한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시인 윤동주, 통신사, 통감 이토 히로부미, 관부연락선, 부산의 식민지 유적, 포항제철, 경주의 신라 문화유적, 3·1운동 학살 현장 제암리 교회, 서울의 한일관계 유적지, 독립운동가 김구와 안중근 등과 관련된 곳을 방문하여 최고의 연구자에게서 설명을 듣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대학생이 일본의 대학생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에서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심기 가다듬고 본래의 사명에 매진할 것
이상은 일본의 한국병탄 100년을 맞아 동북아역사재단이 수행한 특별한 사업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연구뿐만 아니라 정책을 개발하고 제언하며 사업을 실행하는 것을 존립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북아역사재단은 역사의 주요 마디를 맞을 때마다 그에 적합한 행사를 능동적으로 개발하여 실행해나갈 작정입니다. 아무튼 2010년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참신한 프로젝트를 많이 추진하여 국내외에 존재감을 마음껏 과시한 한 해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2011년도 2010년 못지않게 다사다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거기에는 일본 교과서의 독도 영유권 기술처럼 동북아역사재단과 관련된 사안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비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은 심기를 가다듬고 본래의 사명을 다 하는 데 매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화해(歷史和解)와 상리공생(相利共生)을 선도하는 연구기관, 정책기관, 실천기관으로서 우뚝 서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지도편달(指導鞭撻)과 격려성원(激勵聲援)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