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9일 일본 동경고등재판소(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유가족 단체들의 '재한 군인·군속 재판' 2차 항소심이 기각되었다. '재한 군인·군속 재판'이란,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들이 지난 2001년 6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야스쿠니 합사 사죄와 유골 반환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한 손해배상 △미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한 소송이다. 일본 도쿄지방법원은 지난 2006년 5월 "한·일청구권협정 등에 의해 원고의 청구권은 이미 소멸되었다"며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었다. 이번 소송을 진행한 원고 대표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이희자씨를 만나 그동안의 소송에 대해 들었다. 이희자씨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 이름을 빼기 위해 20년이 넘게 일본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지난 번 소송 패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재판에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일본 사법부의 양심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 싸움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8년 동안의 변화와 달라진 점, 성과가 있다면?
일본 안에 우리를 지원하는 그룹이 있다. '노합사(NO 合祀)', '일본 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단체' 등이 그들이다. 이 단체들의 지원으로 우리가 일본에서 소송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일본과 국내에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바램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진상을 규명하는 특별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다. 재판에서 패소는 했지만 '진상규명특별법'을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패소했으므로 졌다고들 하지만 나는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후 최대 보상 소송이라고 한다. 지난 2001년부터 소송을 준비하였고, 어느덧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소송 진행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소송 원고들은 이번 소송을 일본의 전후보상 종합세트라고 말한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 문제, 유골반환문제, 미확인 유족들의 기록 공개문제, 공탁금문제 등이 모두 포함돼 있고 보상만이 아닌 일본정부에 요구할 모든 것이 이 소송에 담겨있다. 기록이 없는 사람이 원고일 경우 소송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진술을 받았다. 416명에 대한 진술서를 받으면서 기록을 찾기 위해 1945년 해방 이전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오는 일본식 제적등본을 찾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유족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만 알고 있을 뿐, 군인인지 군속인지, 기업노무자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유족 한사람 한사람의 요구들을 담아 일본 측에 전달했다.
일본 하토야마 총리가 당선 된 후 일본 정부에 거는 기대도 남달랐을 것 같다.
하토야마 정부에서 보상 문제가 다뤄진다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올 3월 일본정부가 6만 명에서 26만 명의 징용자 공탁금 기록을 한국정부에 제공하기로 했다. 명부만 받는다면 그동안 자료가 없었던 유족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3월에 일본정부로부터 징용자 공탁금 기록을 받으면 소송에 유리한 부분이 있나?
'진상규명특별법' 외에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지원법'이 있는데 징용자 공탁금 기록을 분석한 후 개개인에게 미불노임이 남아 있는 사실을 명부를 통해 확인한다면 지원법에 따라 지원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정부에서 어떻게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유리하다 아니다 단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진상규명특별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법 제정에 앞장섰던 한 사람으로 한국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1974년 '대일 민간청구 보상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강제동원으로 해방 전에 사망한 사람에게만 1인당 30만원을 지급하고, 내국인에 대한 보상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정부의 홍보 부족으로 보상 사실을 몰랐던 사람도 많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 이외의 형태로 피해를 봤다. 그런데도 한시법으로 끝내버린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류를 계속 그대로 두지 않기를 바란다.
소송은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합사되어 있는 대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와의 연대 없이는 힘들었을 텐데 한국, 대만, 일본 오키나와 유족들과 어떻게 연대를 하고 있나?
야스쿠니를 반대하는 국제 연대에 앞장서고 있는 대만 원주민 출신 입법의원(국회의원)인 가오진 쑤메이는 2002년에 처음 만났다. 2003년과 2004년 일본에서 만났다가 무단 합사에 대해 함께 싸우자고 해서 2005년부터 연대를 하기 시작했다. 대만 외 오키나와 유족과도 연대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논리에 따르면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은 일본인의 합사는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서는 굴에 원주민을 몰아넣고 강제로 자살 하도록 했다. 이것을 과연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라고 봐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에서도 합사 반대운동을 벌이는 것이고 우리와 함께 야스쿠니 합사 철폐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일본과의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어 이를 번복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잘못된 것은 다시 한번 정리를 해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재단의 7대 현안 중에 야스쿠니 문제가 있다. 재단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의 부당성과 합사철폐 소송을 위한 연구를 통해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하고 지원해주길 바란다. 지난 해 야스쿠니 신사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홍보에 큰 효과가 있었다. 2010년에는 일본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재단의 도움으로 전시 등을 통해 야스쿠니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2010년의 활동 계획은?
지금 최고재판에 항소를 준비하고 있다. 또 현재 야스쿠니 무단합사 취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야스쿠니 소송은 1심이 아직 안 끝났고, 이 소송은 빨리 판결이 나지 않을 것이다. 2010년은 야스쿠니 신사의 부당성, 일본정부가 외면해왔던 일본사법부의 양심을 묻는 활동을 할 생각이다. 재판은 승소를 하기 위해서만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배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가족들, 일본에 가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맞는데 기록이 없는 사람들, 이들의 절규를 일본 정부와 국제사회에 들려주는 것이 활동 목표다. 일본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을 유엔에 호소하고 싶다. 또 지금까지 나의 활동을 제대로 정리 하고 싶다. 꼭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와 사죄를 받고 싶다. 일본과 원수로 살수는 없다. 일본 정부의 진심은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피해자들이 보상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물소개 / 이. 희. 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및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1992년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태평양전쟁피해자 단체활동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이사현씨는 1944년 2월 일제징용령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다가 사망하였으며, 이희자씨는 1997년에 아버지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2001년 6월 유족 252명을 원고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합사취하, 유골반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하였으며, 2007년 2월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합사취소 소송을 시작, 현재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소송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