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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후덕한 인상을 한 이 인물은 누구일까?
후덕한 인상을 한 이 인물은 누구일까?▲ 표지 그림 : 안악 3호분 서쪽 곁방 서벽 벽화안악 3호분 서쪽 곁방에 그려진 묘주(墓主)로 보이는 사람의 초상화다. 이 사람은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이라는 주장과 중국에서 망명한 귀족 동수(冬壽)라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묘주는 연꽃이 화려한 비단 장막 아래 평상(平床)을 깔고 앉아 있다. 얼굴은 후덕해 보이고 손에는 귀족층의 상징품인 주미(麈尾:털부채)를 들고 있다. 평상 뒤로는 ‘ㄱ’자 병풍이 둘러져 있으며, 허리 뒤로 고급 빙궤(憑机:팔을 걸쳐서 몸을 기대는 좌식용 가구)가 보인다.왼쪽과 오른쪽에 그려진 신하들은 머리에 문관용 책(幘:의례용 모자)을 쓰고 붓이나 목간(木簡:종이가 발명되기 전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나무 조각)을 든 채 무언가를 보고하며, 받아 적고 있다. 이 그림들 옆에 붉은색으로 소사(小史), 기실(記室), 문하배(門下拜), 성사(省事) 같은 관직명이 쓰여 있어 이들의 신분을 알려준다.중앙에 그려진 묘주를 중심으로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그린 이 벽화는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이뤄 매우 안정감이 있다. 빙궤의 무늬나 묘주의 수염, 주미의 털 등은 한올 한올 정성스럽고 섬세하게 묘사되기도 했다.이토록 웅장하게 지어진 고분 속 참으로 후덕하게 그려진 초상화의 진짜 주인은 과연 누구일지, 그의 신분보다도 그가 생전에 살았던 삶을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그림이다.자료 참고 : 동북아역사넷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기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2015년 달력도 마지막 장만 남았다. 한일협정 50주년, 해방 7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해, 경색된 한·일 관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리라는 일반 시민들의 기대는 여전히 유효한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후 더욱 침체했던 한·일 관계는 지난 6월 한일협정 50주년을 맞아 양국 정상이 기념식에 교차 참석하는 것으로 새로운 물꼬가 트일까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1월 아베 총리와 정상 회담을 했다. 그러나 현안인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난기류를 형성하고 있고, 한·일 양국 사이에 좁혀지지 않은 인식 차는 국장급 회의를 통해 과연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한·일 관계의 미래가 불투명했던 지난 8월 말,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채택결과가 드러났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의 추산에 따르면, 일본 우익교과서인 이쿠호샤 교과서의 채택률은 역사 6.5%, 공민 5.7%이다. 이것은 2001년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인 후쇼샤 교과서가 0.039%였던 것과 달리 놀랄만하게 상승한 수치다. 내용면에서도 독도 문제는 역사와 공민, 지리 모든 교과서에 실렸고 그 내용도 예전보다 강화되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지난 14년 동안 점차 기술이 줄어들더니, 올해 검정을 신청한 마나비샤 외에는 모두 기술하지 않았다. 이쿠호샤 공민교과서는 아베 총리 사진이 12회 이상 게재되는 등 아베 정권의 홍보물 역할을 하고 있다.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의 역사는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왜 이들이 교과서에 주목했을까? 왜 역사와 공민교과서였을까? 일본 우익들의 문제 인식은 일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그 주된 원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강조하는 자학사관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랑스러운 일본인 상과 자학사관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고, 일본인에게 직접 자긍심을 심어주는 교과
글 양미강 (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운영위원장)
"고구려 고분 속 청룡 첫 대면 순간 아직도 생생"
인터뷰 "고구려 고분 속 청룡 첫 대면 순간 아직도 생생"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매년 역량 있는 해외 연구자를 초청하여 한국에서 연구조사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올해에도 해외 연구자 8명이 재단 초청으로 한국을 다녀갔거나 현재 체류 중이다. 지난 10월부터 한국에 들어와 “접촉, 교류, 그리고 네트워크 : 가야 연맹의 직물과 장례 문화 그리고 일본과 관계(기원 후 3~6세기)”를 주제로 연구 중인 아리안 페린 박사를 재단의 금경숙 연구위원이 만났다. 아리안 페린 박사의 연구 활동과 흥미로운 한국 고대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_ 편집자 주아리안 페린(Ariane PERRIN) 박사현재 파리 국립 7대학(University Paris Diderot)에서 한국예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전공하였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국제학계에 한국고대사, 미술사 등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를 알리는 데 노력하고 있다.금경숙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매우 흥미롭다. 특히 유럽인이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여 학위 논문을 썼다는 점에서 더 눈길이 갔는데, 고구려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아리안 페린 영국의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박사학위 논문주제(사후 세계로 가는 길: 기원 후 4~7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우주론적 요소)를 정할 때 백제 왕국의 장례 문화와 고구려의 장례 문화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나 매우 독특한 장례 문화 형식과 건축 양식을 만들어낸 고대 왕국의 고고학과 역사에 더 관심이 갔기 때문에 고구려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행해지는 장례 문화와 그 역사의 세계사적 의의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 지역 고분들이 매우 신비스러웠다. 어떤 사람이 이 고분 안에 묻혀 있을까? 그들은 어떤 사회계층 출신이었을까?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등의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다.또 고구려 무덤과 유적지가 중국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어로 쓰인 출판물과 유적 안내 등을 읽어보는 데 나의 중국어 지식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
진행·정리 금경숙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대한민국의 성공과 도전 그리고 미래" 국제 학술회의 "미·중 사이 한국의 선택, 미래를 결정할 것"
기고 "대한민국의 성공과 도전 그리고 미래" 국제 학술회의 "미·중 사이 한국의 선택, 미래를 결정할 것" 1987년 미국 유학을 시작한 후 첫 크리스마스에 학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 파티를 했었다. 파티라고 해봐야 바비큐(돼지를 통으로 굽는 것이 아니라 햄버그를 석탄불에 굽는 것)와 옥수수 칩, 각자 가지고 온 음식들을 내놓고 우리나라 어른들(대학을 졸업하면 다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때 1불짜리 지폐에 누군가 볼펜으로 낙서해 둔 게 있어서 유심히 봤는데, 도대체 해석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Martha, Termnites are eating my teeth”라는 글풍선을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입 옆에 그려둔 것이었다. ‘Martha’는 워싱턴의 와이프 이름이고 ‘Termite’는 나무를 갉아먹는 흰 개미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워싱턴의 이를 갉아 먹어? 워싱턴의 의치(義齒)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을 빗댄 아이들의 장난이라는 것이 당시 미국 친구의 설명이었다.▲ 워싱턴 국제 학술회의 모습지도자의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한 변수최근 워싱턴(Washington)을 다녀왔다. 광복 70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성공과 도전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재단이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원래 계획했던 프로그램에는 일제 강제 병합시기 유산에 관한 주제를 포함시켰으나, 총리실 기념사업단에서 우리나라 전체 학술행사를 종합하다 보니 역할 분담이 필요했고 그래서 재단의 학술회의는 미래 희망을 주요 메시지로, 광복 이후에 집중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이렇게 하여 패널구성은 ① 광복과 건국, ② 성공과 도전, ③ 통일과 미래로 조정하였다. 전체적으로 논의는 한미동맹의 출발과 오늘의 과제로 모아졌다. 많은 발표들을 포괄하는 주제는 장차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따라 한국이 앞으로 강대국으로 나아갈 지, 작은 나라에 그칠 지 결정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결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주장이 있었다.한미동맹 출
글 최운도 (정책기획실 정책팀장)
'클리셰' 아닌 진짜 독도를 마음에 새기다
기고 '클리셰' 아닌 진짜 독도를 마음에 새기다 영화사전에는 클리셰(Cliché)라는 단어가 있다.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쓰여 뻔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나 캐릭터, 영상 스타일 등을 포괄해서 칭한다. 클리셰란 결국 비판 없이 반복되는 특성이라고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독도를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독도는 클리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배경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독도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사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터넷 속 독도 풍경 사진들은 늘 일정한 장소에서 동일한 앵글로 습관적으로 찍혀 왔다. 그리고 복제한 듯,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독도에 관한 관념과 의미 심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독도를 우리의 땅으로 인정하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확고한 개념 속에 존재하는 ‘인정’이 아닌, “클리셰” 같은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습관적 의미에 머물러 있는 독도를 진정한 의미로 승화시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고, 그곳에서 숨 쉬어 보는 것이다.▲ 독도 남동쪽 암벽에 새겨진    ‘한국령(韓國領)’ 표시영화감독들, 독도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설레다예술가에게 우리 땅 독도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문화예술인 울릉도 독도 답사’가 10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 4일 동안 열렸다. 이번 답사팀에는 한국 영화를 이끌어가는 임순례, 정윤철, 장철수, 봉만대 감독을 비롯해 한국영화감독조합 소속 감독 12명이 대거 참여하였고, 예술인복지재단 소속 예술가와 기관 담당자, 그리고 동북아역사재단의 유관 기관 직원들도 동참하였다. 10월 11일 오후 6시 무렵, 동해시에 마련된 숙소에 모인 참가자들은 가벼운 상견례를 하고, 서로 안전한 답사를 기원하였다. 그날 밤, 문화예술인들은 마치 소풍 전날 어린아이들처럼 설렘 가득한 마음에 쉽게 잠들지 못하였다. 다음날 아침, 답사팀은 동해항에서 여객선에 올라탔다.4시간이나 되는 긴 항해 시간 동안 몇몇 감독들은 난생 처음 멀미를 경험하기도 했다. 스타일이 생명인 감독들에게 속 울렁거림은 배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축
글 하원준 (영화감독)
이순신, 문장에도 능했던 지장
역사인물 이순신, 문장에도 능했던 지장 16세기 후반, 조선은 집권세력인 동인과 서인 간 정권 다툼으로 붕당정치의 정쟁이 심하여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물결에 부응하여 세력을 키워 대륙에 침략을 꾀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는 일본 천하를 제패하고 대륙 침공 작전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든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는데, 초반에는 일본의 승세가 한반도 전역에 미쳤으나 전라부대를 이끈 이순신이 일본군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하고 해전에서 연승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1588년 일본이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조선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자, 1590년 조선은 일본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이들이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하는데 전쟁설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온 서계(書契)에 들어 있는 “이듬해 2월 명나라로 곧장 향하려 한다.”는 내용은 조선을 긴장하게 하였다.해전과 육전 어느 쪽도 폐할 수 없다조선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비변사에 장수감이 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유성룡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도수사에 임명하게 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순변사 신립(申砬)의 건의에 따라 수군을 파하고 육전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해구(海寇)를 차단하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으니, 해전과 육전을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조정에서 이를 따랐다.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던 맏아들 쓰루마쓰(鶴松)가 죽자 전쟁을 선포하고, 명나라 정벌 기일을 ‘1592년 3월 1일’로 정했다. 이순신은 1592년 정월부터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각 진영에 무기를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전쟁 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1월 1일부터 《난중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진영과 군대의 상황, 전쟁 업무에 관한 일들이 망라되어 있다. 부득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날을 제외하
글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 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알타이 스케치 2 : 산지 알타이 편》 알타이 문명을 연대기 순으로 살피고 의미를 추적하다
재단 새 책 《알타이 스케치 2 : 산지 알타이 편》 알타이 문명을 연대기 순으로 살피고 의미를 추적하다 《알타이 스케치 2 : 산지 알타이 편》동북아역사재단│2014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이 지난 2014년 말 발간한 《알타이 스케치 2 : 산지 알타이 편》은 러시아 고르노 알타이(Gorno Altai, 산지 알타이) 지역에서 피고 진 선사문화와 고대 문화를 연대기 순으로 조망한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산지 알타이 지역에 언제 인류가 등장하였으며, 그들은 누구였고, 또 후속 문화의 주인공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필 수 있다. 또 각 시기별 문화 주인공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도구 개발을 하였으며, 이 지역 최초 주민들이 남긴 시원(始原) 문화를 이어지는 후속 세대가 어떻게 계승 발전시켰는지, 그와 병행하여 이 지역 구석구석에 남겨진 암각화는 당대 물질문명이나 정신문화와 어떤 함수관계가 있고, 각 문화기별 시대 양식은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등에 관하여 살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문화상들은 우리 민족문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소위 ‘알타이’란 말은 몽골어 ‘알트(Alt)’ 또는 ‘알탄(Altan)’에서 온 것이며 이는 ‘황금’을 뜻한다. 중국은 근년에 ‘알타이’를 음차(音借)하여 ‘阿尔泰’라 쓰기도 하지만, 그동안 ‘금산(金山)’으로 표기하였다. 물론 러시아 통계에 따르면 산지 알타이에서 생산하는 황금이 러시아 전체 생산량 중 90%를 차지한다고 하니, 산 이름은 물론이고 도시 이름도 ‘알타이’라 한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산이 지니는 진정한 함의를 꼭 광물로서의 ‘황금’에만 한정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산이 지닌 다함이 없는 생명원으로서의 복합적인 가치 때문일 것이다.남북 총 연장 1,600km에 이르는 이 거대한 산맥은 서북쪽으로 칼바(Kalba) 산맥, 동북쪽으로 사얀(Sayan)과 쿠즈네츠크(Kuzneck)와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몽골과 중국 신장, 그리고 카자흐스탄 동부지역에 걸쳐 있다. 이 산의 최고봉은 산지 알타이의 ‘벨루하(Belukha)’인데, 높이는 해발 4,5
글 장석호 (역사연구실 실장)
동양척식주식회사 터 경제 침탈 소굴로 뛰어든 독립 투쟁의 불꽃
현장보고 동양척식주식회사 터 경제 침탈 소굴로 뛰어든 독립 투쟁의 불꽃 ▲ 일제 강점기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 모습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을지로는 대형 쇼핑센터와 굵직굵직한 회사들이 있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권이다. 명동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골목마다 크고 작은 상점들이 밀집해 서울을 찾은 관광객과 오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연말이면 화려한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와 휘황찬란한 불빛까지 등장해 거리를 장식하는 곳.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풍경들이다.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 인근에 국내 유명 금융회사 본점이 있다.1908년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일본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가 있던 자리다.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부원 개척(富源開拓)’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운 이 회사는 그러나 헐값에 넘겨받은 토지를 일본인에게 양도하고, 조선의 영세 소작농들에게 고액 소작료를 받는 전형적인 식민지 수탈기관이었다.1922년 황해도 재령군에 동척이 운영하는 농장이 있었는데, 흉년에도 5할에 달하는 소작료를 강요당하던 농민들이 참다못해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동척과 일본인 지주들은 오히려 이들한테 소작권을 빼앗고 무력으로 탄압해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은 감옥에 끌려가고, 살 터전을 잃은 농민 대다수는 만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나고 자란 나석주에게 이 일은 누구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이 세운 양산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투사로 의열단 활동을 해온 그였다. 마침내 1926년, 3·1운동 후 다소 침체해 있던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다시 한 번 민족혼을 깨워야겠다고 판단한 김구 앞에 나석주가 적임자로 나섰다.찬바람이 몰아치던 1926년 12월 28일 오후, 폭탄 두 개와 권총을 품에 안은 나석주가 동척과 함께 대표적 수탈기관이었던 조선식산은행 건물 안으로 폭탄 하나를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불발했고, 마음이 급해진 나석주는 재빨리 동척으로 향했다.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비롯해 일본인 대여섯 명을 사살한 뒤 남은 폭탄 한
부끄러우나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마주하며
현장보고 부끄러우나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마주하며 집 근처에는 자연과 놀이동산이 어우러진 ‘석촌호수’가 있습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호수지만, 사계절 아름다운 나무와 잔잔한 수면, 그리고 종종걸음을 걷는 거위 떼가 이루는 풍경이 좋아 온 가족이 자주 산책을 나가는 곳이지요.그런데 얼마 전,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큰 아이가 “엄마, 이게 뭐에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가리킨 것은 ‘삼전도비 10m’라고 적힌 작은 표지판이었습니다. 삼전도비? 몇 년 동안 이 길을 다녔는데, 왜 그동안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을까... 무심코 지나쳤던 표지판에 호기심이 생겨 아이들과 함께 가 보기로 했습니다.화살표 방향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처음 보는 구조물이 있었습니다. 구조물 안에는 거북이 모양의 석상 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나머지는 거북이 모양을 한 석상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작은 석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삼전도비 이전 안내문 - 이 비는 당초 한강변 나루터 인근에 세워졌으나 치욕의 역사물이라는 이유로 수난과 수차례 이설을 거듭해왔다... (후략) -”‘삼전도비’를 검색해 봤습니다. 내용을 보고 여러 생각이 스쳤습니다. ‘삼전도비’는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한다는 의미로 무릎 꿇고 머리를 땅에 찧는 예를 올렸는데, 이에 청태종이 승전 기념비를 세우라는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니...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보통 기념비와 다르게 ‘삼전도비’는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아직 10살 밖에 안 된 아이에게 난감했지만 이 비가 무엇이고 왜 세워졌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부끄럽고 슬픈 역사도 우리가 기억해야만 되풀이 되지 않는다’는, 어느 칼럼니스트가 쓴 삼전도비의 의미까지 열심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어디까지 이해할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우리 역사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글. 김정선(서울 송파구 석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