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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고구려 벽화에 남은 서역의 흔적
고구려 벽화에 남은 서역의 흔적▲ 표지 그림 : 강서대묘 석실 천정도강서대묘 천정은 잘 다듬은 삼각형 화강암 판석을 묘실 안 네 모서리 위로 엇갈리게 쌓아 올린 뒤 다시 사각형 판석으로 상부를 덮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삼각 모줄임방식’이라 부르는 이런 축조 방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하던 건축양식으로, 당시 고구려와 서역의 문화교류를 엿볼 귀중한 자료다.삼각 모줄임방식으로 축조한 천정은 묘실 벽 위에 바로 석재를 올려 천정을 덮는 방식에 비해 훨씬 입체적이면서 상부에 높다랗게 트인 공간을 만드는데, 마치 둥근 하늘을 보는 느낌을 준다. 또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고구려인들이 염원하는 사후 하늘세계를 벽화로 표현하기에도 매우 적합하였다.천정 고임돌 첫 번째 단에는 인동당초 무늬, 두 번째 단에는 연꽃과 서수 혹은 비천상, 세 번째 단 삼각 고임석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천정 중앙 덮개석에는 똬리를 틀고 있는 황룡을 묘사해 묘실 내 사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과 함께 도교의 오행신앙(五行信仰)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특히 벽화는 수묵화의 선염법(색을 조금씩 엷게 발라 명암을 나타내는 기법)처럼 섬세하면서도 매우 우아한 느낌을 주는데, 당시 고구려인의 신선관과 산수화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자료 참고 : 동북아역사넷
1965년 한일협정 체제의 역사적·법적 조명과 보완 방향
기고 1965년 한일협정 체제의 역사적·법적 조명과 보완 방향 1965년에 체결한 한일협정은 지난 50년간 한일관계의 법적 토대로 기능해 왔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의 공과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으나 법률 문서로 이루어진 역사 자료이므로 역사적 해석방법과 법적 해석방법으로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에 따르면 역사는 어제의 역사적 사실을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하되, 앞뒤로 인과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1965년 한일협정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이에 맺은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일협정체제가 50년간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 식민지배 청산에 미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보아야 할 것이다.반사실적 추론으로 살펴보는 한일협정 체제그런 방법과 병행하여 반사실적(反事實的, counterfactual) 추론을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이 ‘반사실적 추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1965년 한일협정을 놓고 “그때 협정을 그렇게 체결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까?” 또는 “그때 협정을 그렇게 체결하지 않았더라면, 그보다 나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나아졌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추론해 보는 것이다.1965년 한일협정의 인과관계 고리를 1965년 이전으로 돌려보면,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제1, 제2, 제3공화국이 치열하게 일본과 교섭했지만 식민지배에 관하여 일본을 단죄하지도 못했고 응분의 배상을 받아내지도 못했다. 그리 된 것은 2차 세계 대전 후 세계질서 구조를 이루는 요인들이 복합 작용했을 것이다. 전승국들은 침략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 놓고도 일본을 관대하게 처분하는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줄기차게 대일항전을 했던 우리나라는 전승국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냉전체제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은 각각 미국과
글 정해웅 (국제법협력대사, 재단 자문위원)
"'동아시아사' 이해를 위한 폭 넓은 관점이 필요하다"
인터뷰 "'동아시아사' 이해를 위한 폭 넓은 관점이 필요하다" 지난 8월 27일 재단에서는 “동아시아의 해양사 국제학술워크숍”이 열렸다. 이 행사는 한국사를 세계 학계에 알리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마련하였으며, 특히 이번에는 해양사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동아시아사를 해양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해양사 연구의 위상과 성과를 살펴보았다. 행사에 참여한 야마우치 신지 교수를 재단의 우성민 연구위원이 만나 해양사 관련 연구 동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 편집자 주야마우치 신지(山内晋次)1961년에 출생하였다. 오사카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연구과 박사후기과정을 수료하였다. 오사카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조수, 같은 대학 준교수를 거쳐 현재 고베여자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해역아시아사, 일본 고대·중세사이며, 주요 저서로는 《나라 헤이안시기 일본과 아시아(奈良平安期の日本とアジア)》, 《일·송 무역과 ‘유황의 길’(日宋貿易と‘硫黄の道’)》, 《해역 아시아사 연구입문(海域アジア史研究入門)》 등이 있다.우성민 최근 한국 학계에서 해양사는 유행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다만 일본이 ‘해역사’ 연구에 집중한 반면, 한국은 ‘해양사’ 위주다. 한국에서 해양사 연구와 해역사 연구는 상호 보완적이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어떤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해역사와 해양사에서 다루는 ‘교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야마우치 신지 해역사나 해양사 모두 영어로 번역하면 ‘Mari time History’지만, 일본 학계에 ‘해양사’라는 말은 없고 주로 ‘해역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두 용어 차이를 살펴보면 ‘해양사’는 바다 세계와 그 연안부에 한정된 범위만 검토 대상으로 보는 반면, ‘해역사’는 바다를 역사의 주축으로 보면서도 바다와 연안부라는 범위만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륙세계까지 동시에 포함한 넓은 공간을 역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따라서 ‘해역사’에서는 중앙 유라시아라는 대륙 내부세계도 포함한다. 그 세계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양 해역세계와 관련 상
진행정리 우성민 (정책기획실 연구위원)
제5회 동아시아공동체 포럼"갈등을 푸는 열쇠는 '협력'뿐이다"
연구소 소식 제5회 동아시아공동체 포럼"갈등을 푸는 열쇠는 '협력'뿐이다" ▲ 조태용 외교부차관 기조연설◆ 재단은 8월 3일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함께 전후 70년, 광복 70주년 계기, 한·중·일 세 나라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를 초청해 제5회 동아시아공동체 포럼(EACF)을 열었다. EACF는 재단이 지원하여 한·중·일 3국 유수 대학[高麗大, 淸華大, 東京大]과 함께 운영하는 것으로, 2011년 서울에서 시작하여 한-일-중 순번으로 서울-도쿄-베이징을 돌며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한반도에서는 광복과 분단 70년, 중국에서는 항일전쟁과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일본에서는 종전 70년이고 국제적으로는 유엔 설립 70주년이면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는 등 한중일의 근현대사를 되돌아 볼 중요한 해다. 이에 이번 회의 주제는 “70년의 분단과 동북아 100년의 미래”로 설정했다.회의는 기조연설과 3국 주요 인사의 라운드 테이블 ‘동북아 3국 협력의 과거와 미래’에 이어 제1세션 ‘동아시아 협력의 역사와 구상 그리고 경험’, 제2세션 ‘동북아의 역사 화해와 지역 협력’ 순으로 진행했다. 라운드테이블에서 소개된 발제문 3개와 각 세션에서 나온 논문 7편은 한결같이 갈등과 대립 속에서도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함께 멀리 가기’ 위한 치열한 토론조태용 한국 외교부 차관은 기조연설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2012년 이후 열리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거론하며 소통을 위해 지역별 포럼을 통한 협력 프로세스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 정부에서 추진 중인 다자간 협력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이 함께 멀리 가자는 구상이라며, 중국과 일본을 향해 “눈앞에 있는 장애물에 눈 돌리지 말고 이익이 될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논의해가자”고 제안했다.▲ 세션▲ 라운드테이블류장용(刘江永) 중국 칭화대 국제관계연구원 부원장은 ‘지정학적 사고방식과 중·미·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전략,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개입 전략, 그리고 아베 내각의
글 차재복 (정책기획실 연구위원)
2015 크라스키노 발해 염주성 발굴"염주성 발굴은 동아시아 발해 유적 발굴의 이정표"
기고 2015 크라스키노 발해 염주성 발굴"염주성 발굴은 동아시아 발해 유적 발굴의 이정표"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설립 후 지금까지 매년 러시아 극동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와 공동으로 크라스키노 발해 염주성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크라스키노는 현재 러시아 연해주 남단지역으로 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이 마을을 형성한 곳이다. 당시 이 마을 이름은 옌추 또는 연추로 불렸으나, 러시아가 동방으로 진출한 후 크라스키노로 바뀌었다. ‘연추’는 발해국 시절 ‘염주’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발해 62개 주 중 하나였던 염주(鹽州)의 소재지는 ‘신라도(新羅道)’와 ‘일본도(日本道)’로 이어지는 관문이었다. 현재는 츄카놉카강 곧 염주하와 포시예트만이 만나는 곳에 있으며, 둘레 1.2km 정도인 평지성을 이루고 있다.7월 15일 크라스키노 마을에 도착하여 이틀 뒤 선현과 하늘과 땅에 고하는 개토제를 지내는 것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 항상 많은 성과를 기대하며 발굴을 시작하지만, 역시 결과는 직접 땅을 파 보고 흙을 걷어내봐야 드러나는 것이다.발해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물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매년 발굴을 시작할 때마다 문서와 기록이 담긴 타임캡슐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지금까지 염주성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기록 유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것 자체가 즐겁다. 언젠가 반드시 찬란했던 발해국의 당당한 위상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기록이 궤짝 몇 개 분량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기대.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한러가 공동 발굴하며 공유하는 무언의 사명인 것이다. 사명! 발해 유적 중 문헌에 명칭이 남아 있고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염주성에서 그 역사의 명을 기다리는 학자들의 염원은 이미 산천과 잔잔히 교감하고 있었다.심화와 확대 발굴의 조화염주성은 ‘염주하’라는 강을 뗏목으로 건너 잰 걸음으로 20분 정도 가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발굴 구역과 성으로 가는 길, 그리고 성 안 지천에 널브러져 있는 푸른 초목에서는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19세기 두만강을 건너 이곳을 터전 삼아 삶을 일구었던 동포들은 1930년대 중앙아시아로 강제
글 김은국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독립운동가이자 진정한 혁명가 신채호
역사인물 독립운동가이자 진정한 혁명가 신채호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사상과 민족운동에서 아나키즘의 수용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신채호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중의 힘을 목도하며 역사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을 인식하였고, 절대독립의 민중직접혁명론을 지니며 그에 합당한 사상으로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단재는 1923년경 스스로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자처하였다. 그가 그해 기초한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은 아나키스트로서 출발을 의미한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아나키스트로서 단재의 면모는 이후 발표한 논설과 문학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아나키즘 수용은 독립 이념과 방법의 주체적 변용그런데 아직도 신채호를 아나키스트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거나, 아나키스트로 평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나키즘 수용을 민족운동에서 이탈한 것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한 오해다. 단재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것은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주의(主義)의 선변(善變)’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사상에서 교조주의를 맹렬히 비판하였고 민족의 현실, 즉 독립운동의 조건과 상황에 맞도록 사상을 주체적으로 변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단재가 변해도 될 것으로 말한 ‘신(身)과 색(色)’은 아나키즘 사상과 운동이며, 변하면 안 되는 것으로 강조한 ‘법(法)과 골(骨)’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독립정신과 독립운동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자신이 ‘조선의 크로포트킨(Kropotkin)’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따라서 단재의 아나키즘 수용과 운동을 민족주의라는 틀 속에 고정시키는 것은 그의 광대한 사상과 민족운동을 좁게 만들 우려가 있다. 무엇보다 아나키스트로서 단재를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바로잡혀야 한다. 그렇다고 그를 순연한 아나키스트라거나 심지어 그가 아나키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민족주의를 수단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지나친 논리다. 요컨대 신채호의 아나키즘 수용과 운동은 그가 이미 경험한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론의 주체적 ‘선변’으로 이
글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정창원 : 역사와 보물》 고대의 타임캡슐 '정창원'의 역사와 보물
재단 새 책 《정창원 : 역사와 보물》 고대의 타임캡슐 '정창원'의 역사와 보물 최근 재단에서 스기모토 가즈키(杉本一樹)가 쓴 《정창원 : 역사와 보물》(中公新書, 2008)의 한글판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일본 쇼소인(正倉院, 이하 정창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의 실태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고대 자료가 한 공간에 수장된 배경, 보존과 관리, 물품의 유래, 연구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책으로, 정창원에 관한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매우 유용하다. 저자는 정창원에서만 30년 넘게 근무하여 누구보다 이곳을 잘 아는 전문가이며, 현재 정창원 사무소장을 맡고 있다.정창원 소장품의 유래와 관리 체계정창원은 일본 나라시에 있는 쇼무(聖武) 천황이 창건한 동대사(東大寺)의 부속 건물이다. 756년 5월 2일 쇼무 천황이 사망하고 49재 법회가 열렸다. 이날 고묘(光明) 황후는 남편 쇼무 천황이 생전에 애용하던 물품 600여 점과 약물 60여 종을 동대사 비로자나불에 바치고, 그후 세 차례에 걸쳐 추가로 자신과 쇼무 천황 유품을 헌납하였다. 이것이 정창원이 보물을 소장하게 된 연유다. 헌납 물품은 헌물장이라 불리는 5개 문서에 명칭, 수량, 크기, 재질, 기법 그리고 물품 유래까지 기록하여 소장 물품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이곳에는 일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국산 물품도 소장하고 있다.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예술품으로 가치가 높은 공예품들은 대부분 신라와 당에서 건너 온 물건이지만, 저 멀리 동남아, 인도, 페르시아, 로마에서 만들어진 유물도 있다. 특히 1300년간 지하에 매장된 일 없이 지상 건축물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타임캡슐이라 해도 좋을 만한 세계적인 유물창고다. 정창원의 소장품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출납 후 이런저런 이유로 되돌려 받지 못하거나, 분실한 물품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국가가 엄격하게 칙봉장 체제로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정창원 건물, 현재는 현대식 건물로 이전하여 보관중이다.저자는 정창원 유물을 4개 군으로 분류한다. 먼저 최초 다섯 차례 헌납 받은
글 연민수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경복궁 내 곤령합, 옥호루 건청궁의 비극, 조선을 휘감은 어두운 그림자
현장보고 경복궁 내 곤령합, 옥호루 건청궁의 비극, 조선을 휘감은 어두운 그림자 ▲ 경복궁 옥호루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가을볕이 쏟아지는 주말 경복궁은 휴일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분주한 공간이다. 광화문을 지나면 마주하는 웅장한 근정전(勤政殿), 우아한 경회루(慶會樓)에는 아름다운 고궁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는 인파로 늘 북적인다. 그러나 이 궁 북쪽 끝자락에 아픈 우리 역사가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1873년 고종은 경복궁 궐내 깊숙한 곳에 양반 가옥을 응용한 250칸짜리 건물을 짓게 한다. 건청궁(乾淸宮)이다. 맑은 하늘을 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이름 붙였을 이 처소는 사랑채인 장안당과 안채인 곤녕합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고종은 1884년 부터 건청궁에서 기거하기 시작했으며, 1887년에는 이곳에 국내 최초로 전기를 가설하였다.하지만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결코 맑지도, 밝지도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조선 왕실은 친러·배일 정책을 추진해 일본을 고립시키려 했다. 1895년 9월, 일본은 조선에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새로 파견해 배일정책의 진원지로 지목한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경복궁 내 건청궁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 2개 대대와 낭인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건청궁에 난입했다. 한 무리는 고종의 침소인 장안당으로 가서 고종에게 왕비 폐출 조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고, 다른 한 무리는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붙잡아 무참히 시해한 뒤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른바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전이 막을 내리기까지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이후 우여곡절 끝에 겨우 수습한 명성황후의 시신 일부는 시해 2년 뒤인 1897년 청량리에서 처음 장사지냈으며, 1919년 경기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하여 고종 곁에 묻혔다. 건청궁도 1915년 일제 조선총독부가 물산공진회를 개최할 때 철거했다가 2007년 10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
나가사키 원폭 피해 재일조선인 위령비 앞에서
현장보고 나가사키 원폭 피해 재일조선인 위령비 앞에서 교무실에서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일본에 적대감을 표현해 난감했다는 일본어 담당 교사의 말을 들었다. 얼마 전 일제 강점기 역사수업을 한 뒤라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나는 일제 강점기 수업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쪽으로 수업 분위기가 흘러간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다. 광복 70년, 한일국교 체결 50주년이라는 뜻깊은 2015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최하는 일본 현장답사는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이런 고민을 안고 시작한 뜻깊은 시간이었다.우리가 후쿠오카 공항을 향해 출발한 날은 70년 전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11일,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은 아베 총리가 담화를 발표하기 하루 전이었다. 나가사키는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속에서 대외 교류 창구인 데지마, 서양인 거류지인 그라바앤, 일본 근대 산업혁명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시마(군함도), 미쯔비시 조선소가 있는 곳이다.하지만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입구에 일본 시민단체가 세운 재일조선인 위령비와 재일조선인들을 후원하면서 다양한 반전 평화주의 운동을 펼친 오카 마사하루의 뜻을 기리는 평화자료관이었다. ‘한·일 역사교사 교류의 밤’에 이곳에서 일하는 기무라 씨를 비롯해 일본인 교사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가해와 피해’라는 갈등의 역사에서 ‘화해와 평화’를 향해 가는 전환점으로 2015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이번 답사는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는 일본 정치권의 태도에 가려 미처 보지 못하고 있던 일본 시민들과 민간단체들이 펼치는 꾸준한 노력을 알게 된 뜻깊은 시간이었다.나가사키 원폭 투하 시점인 11시 6분에 멈춘 시계 바늘은 오늘도 역사에 준엄한 경고를 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글. 전정희 (부천 상동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