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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과 분단선을 뛰어 넘어 대화하고 연대하는 틀을 만들자
기고 국경과 분단선을 뛰어 넘어 대화하고 연대하는 틀을 만들자 70년 전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은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세계사의 모순과 악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온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위대한 사건이었다. 독일 나치를 패망시킨 연합군의 승리는 유럽을 전체주의 파시즘 독재와 인종학대 위협에서 해방시켰고, 원폭투하로 일본 천황이 항복한 8월 15일은 아시아를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잔혹한 수탈로부터 해방시킨 광복의 날이었다.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70년 역사는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다.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단한 후 유럽 국가와 국민들이 과거 적이었던 관계를 속히 청산하고, 화해를 이뤄 유럽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하고는 오랫동안 냉전을 지속하였지만, 70년대부터는 헬싱키조약을 통해 유럽 안보협력체(CSCE)를 구축하고 인적, 물적 교류협력을 늘려오다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의 통일과 동서 유럽이 결합하였고, 하나의 유럽을 향해 전진하게 되었다.전후 70년 유럽과 동아시아가 밟아온 역사의 궤적여기에 비해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서 해방된 동아시아는 그 후로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수백만 동족이 서로 학살당하는 참화를 겪었으며, 냉전시대가 끝났다는 1990년대 이후에도 남북한 간 대화와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고, 북한의 핵개발과 남한의 첨단 무기 배치 등 무력 경쟁과 충돌 가능성마저 높아, 평화로운 동아시아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심지어 핵전쟁 위기 앞에 놓인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연합군이 승리하여 나치 독일과 일제를 물리친 후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동서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체제를 만들고 경쟁한 것은 유럽과 동아시아가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아시아에서는 전범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일본 천황을 처단하지 못했고, 일본이 아닌 한반도를 분단하여 미국과 소련이 나눠 지배하면서 미·일과 중
글 이삼열 (동아시아평화를위한역사NGO포럼 상임대표, 재단 자문위원)
"동북아시아사 정립, 역사·문화 겹치는 이웃 국가 간 공동 연구가 중요"
인터뷰 "동북아시아사 정립, 역사·문화 겹치는 이웃 국가 간 공동 연구가 중요" 올해는 한국과 몽골이 수교한 지 꼭 25주년인 해다. 고구려, 부여 등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동몽골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을 만큼 몽골과 한국은 다양한 층위에서 역사·문화가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 양국의 학술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 재단은 지난 2011년, 몽골 과학아카데미와 협약을 체결하고 ‘한·몽 역사가협의회’를 발족해 몽골과 역사·문화 분야의 학술교류를 지속해오고 있다. 이번 호에는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고고학연구소의 S. 촐론 소장을 만나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주목하고 있는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문화와 주변 국가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_ 편집자 주S.촐론(S. Chuluun) 소장1999년 몽골국립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 러시아 국립사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몽골국립대학교 전임강사, 몽골국립무역대학 부학장을 지냈으며, 2010년부터 현재까지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고고학연구소 소장을 맡고있다. 중세 몽·러 관계사를 전공하였으며, 몽골 민속학 등에 관한 저서를 포함하여 약 10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장석호 2015년은 한국과 몽골이 수교한지 25주년이다. 또 2016년은 우리 재단과 몽골 과학아카데미가 협약을 체결한 지 10년째가 된다. 여러 가지 감회가 있을 것 같다.S. 촐론 몽골은 1990년 사회주의 체제를 벗어난 후 아시아 여러 국가 중에서 제일 먼저 한국과 수교했다. 두 나라가 활발하게 협력하고 있는 분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성과를 내고 있는 분야가 역사학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몽 국민이 아시아 다른 나라보다 서로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언어, 문화, 역사라는 무대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친근함이 양국의 관계 발전으로 이어진 것은 공식 기관들 사이 끊임없는 교류와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단과 몽골 과학아카데미가 체결한 포괄적 학술교류 협정도 그중 하나다. 두 기관은 이 협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2011년 ‘한
인터뷰 진행정리 장석호 (역사연구실장)
광복 70년(한·일 국교수립 50년) 국제학술회의 "동북아 지역 내 세력 전이로 생긴 거시적 흐름 직시해야"
연구소 소식 광복 70년(한·일 국교수립 50년) 국제학술회의 "동북아 지역 내 세력 전이로 생긴 거시적 흐름 직시해야" 광복 70년(한·일 국교수립 50년)을 맞아, 최근 동아시아의 정치 변동과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 위안부 문제와 영토 문제에 관해 한·중·일 전문가들이 서로 인식을 공유하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재단 주최와 동아일보 후원으로 개최하였다.“요동치는 동아시아 : 역사를 넘어서 새로운 질서로의 재편까지”를 주제로 2015년 7월 2일∼4일까지 열린 이번 학술회의에는 참가자는 한·중·일 동북아 국제문제 전문가, 대학교수 등 20명이 참석, 주제 발표에 이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제1부 ‘요동치는 동아시아 정세 : 어제와 오늘’에서는 중국의 급부상과 일본의 우경화, 변화하는 미·중 관계와 한·일의 불화 같은 소주제를, 제2부에서는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와 ‘위안부’문제, ‘집단적자위권’과 일본의 영토문제에 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마지막 제3부에서는 참가자 전원이 참여하여 종합토론을 벌였다.학술회의 당시 한·중·일 전문가들은 8월로 예정하고 있던 아베 담화에 별다른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오히려 담화가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니시노 준야(西野純也) 게이오대 교수는 발표 논문 ‘불안정한 동아시아 정세 - 한·일 양국의 인식 차와 관계 악화’에서 “한·일 관계가 직면한 어려움은 두 지도자들 사이에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불신감만 커지고 있기 때문인 것은 틀림없으나, 두 나라 정부가 취하는 대일본, 대한국 정책의 배경에는 한·일 양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동북아 군비경쟁을 넘어 평화체제로’에서 “2015년 여름, 동북아 정세는 19세기 말 유럽의 국제정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며, 중국의 해양진출과 도서 분쟁, 일본의 가치외교를 통한 중국 포위정책 전개와 관련한 한국의 역할과 고민을 분석하였다. 이어서 이동률 동덕여대 교수는 ‘중국의 적극 외교와 동북아 정세의 영향’을 주제로 중국의 주변국 외교 진
글 이명찬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중국에서 찾은 고조선 문화 유적
현장보고 중국에서 찾은 고조선 문화 유적 재단은 7월 13일부터 18일까지 국사편찬위원회와 공동으로 한국 상고·고대사와 관련된 역사 현장인 산해관과 갈석산, 요녕성내몽골자치구 일대의 신석기~청동기시대 여러 유적을 답사하였다. 조사지역은 중국 하북성(河北省) 진황도(秦皇島), 요녕성(遼寧省) 능원(凌源)과 조양(朝陽),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 적봉(赤峰) 일원이었으며, 재단 김학준 이사장과 국사편찬위원회 김정배 위원장을 공동 대표로, 재단의 고광의 역사연구실 2팀장, 필자, 강정미 홍보팀장, 윤지훈 행정원과 국사편찬위원회의 박남수 편사연구관, 조영광 편사연구사 등 두 기관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장성 동단 노룡두에 선 김학준 재단 이사장    (왼쪽)과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7월 13일,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 답사단은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영평부성(永平府城)과 난하(灤河), 창려현(昌黎縣)의 갈석산(碣石山)을 찾았다. 이 지역은 학계에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고조선 강역 논란의 중심 무대다. 현재 학계 일각에서는 난하와 갈석산을 고조선의 서쪽 경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의 치소를 바로 영평부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상황이다.갈석산·난하 유역 고조선의 흔적과 장성의 동단이 가운데 갈석산은 남쪽에서 요서 지역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우뚝 솟은 장대한 산으로, 역사상 고대부터 한국과 중국 사이 경계가 되는 주요 표지 역할을 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영평부성은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의 구조, 축성 방법으로 봤을 때 성곽 자체만으로는 고조선의 중심지라고 직접 연관시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답사단의 판단이었다. 이와 관련한 문제는 향후 성 안팎과 주변 유적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사료를 분석하여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음을 공감하였다.중국은 2012년 느닷없이 ‘장성보호공정’을 들고 나와 장성의 총길이를 4배 이상 늘려 발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특히 2000년대 이후 중국은 압록강 북안에 자리하고 있는 호산산성(고구려시대의 박작성으로 비정)
글 정원철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진시황제, 우리가 아는 '중국'의 뼈대를 세우다
역사인물 진시황제, 우리가 아는 '중국'의 뼈대를 세우다 시황제(B.C.259~B.C.210)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진왕 정은 유능한 인재를 국적에 관계없이 발탁하여 내정을 공고히 하고, 동시에 교묘한 외교술과 기마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무력을 통해 B.C.230년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필두로 조, 위, 초, 연, 제 이렇게 여섯 나라를 불과 10년 만에 평정하고 통일을 달성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은 ‘왕’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채택하였다. ‘황제’ 칭호는 그 후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 약 2,100여 년 동안 중국 역대 왕조에서 군주를 부르는 정식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또 시황제는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어, 각 군마다 수(守)·위(尉)·감(監)을 두고 전국에 군현제를 시행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도량형·화폐·도로·문자 통일로 일군 불멸의 업적시황제는 전국시대 각 국가마다 달랐던 도량형을 통일해 진량(秦量)·진권(秦權)이라 불리는 승(升)이나 분동(分銅)을 반포하였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지방 근처에서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이 용기를 배당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하였다. 한편 화폐경제의 맹아도 이미 서주춘추시대에 보이기 시작하였지만 전국시대에 이르자 나라마다 형태가 다른 화폐를 주조하였다. 시황제는 지금 우리가 아는 둥근 동전 중앙에 사각 구멍을 뚫은 반량전 형태로 화폐를 통일하였다.당시 각국은 다른 나라 수레가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 폭을 달리 하고 있었는데, 시황제는 수레 폭을 6척으로 통일하고 전국 도로망도 정비하였으며 문자를 통일하였다. 또 치도(馳道)를 건설해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본래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군대를 신속하게 이동시켜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이후 교통과 상업 발달에도 기여했다. 이와 함께 문서행정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이사가 고안했다는 소전(小篆)으로 문자를 통일하였다. 그런데 ‘수호지진간’은 통일 이전, 즉 시황제가 아직 문자를 통일하기 전 문자
글 임병덕 (충북대학교 교수)
《제국주의 유산과 동아시아》 제국주의에서 찾은 동아시아 역사 갈등의 기원
재단 새 책 《제국주의 유산과 동아시아》 제국주의에서 찾은 동아시아 역사 갈등의 기원 ▲ 이근욱 최정수 김원수 이영관     최덕규 최덕수 김기윤 지음‘제국주의’는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다. 이 말은 영국인들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침략 전쟁을 떠올리며 비난받아야 할 대상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굳이 국가나 특정 정치체제가 세력을 확장하여 국외 지역에 진출하는 모습 혹은 그런 의도를 근대사에서 표현하자면 ‘식민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 16,17세기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에서 우리는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유럽인들의 꿈을 읽을 수 있다. 이들에게 ‘식민주의’란 사람 손이 미치지 않은 비옥한 토지를 작물의 생산지로 만드는 작업, 널려있는 사냥감을 수렵하여 식량화하는 작업이나 버려져 있는 삼림을 벌채하여 농경지를 확장하고 목재를 이용하는 작업을 뜻했다. 요컨대 이들에게 ‘식민’이란 새로운 지역에 문명을 이식하여 주민들은 물론 자연을 개선하는 과정이었다.영국의 팽창정책을 비판한 홉슨의 제국주의론19세기 후반 제국주의는 열강의 힘과 도덕적 의무를 표상하는 자랑스러운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영국인 홉슨이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제국주의는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경제적 침탈을 목적으로 하는 팽창주의 이미지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홉슨의 비판은 제국주의 팽창정책이 대부분 영국인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시도였다. 홉슨은 당시 영국의 팽창정책을 추동하는 세력이 판로와 투자처를 찾아 정치적 해외 팽창을 시도하던 산업 및 금융자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팽창적 제국주의론에 맞서 제기된 이론이 제국주의 주변부 이론이다. 이는 제국의 팽창을 위해 주변부 또는 식민지의 역할과 힘을 과소평가해 왔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주변부 이론가들은 제국은 원래 비용이 적게 드는 간접통치를 원했으며, 무력정복과 같은 폭력수단 즉 제국주의적 수단은 간접통치를 위한
글 최덕규 (역사연구실 연구위원)
강우규 의사 의거지 터 대한 노인의 기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현장보고 강우규 의사 의거지 터 대한 노인의 기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지금의 서울역 광장인 당시 남대문역 앞은 식민지 조선에 부임하는 세 번째 총독을 환영하기 위해 강제 동원된 인파로 북적였다. 사이토 마코토는 3·1운동을 진압한 다음,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허울 아래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임무를 띠고 새로 총독에 임명된 자였다.남대문역에 내린 사이토 일행이 환영행사를 마치고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군중 속 한 인물이 갑자기 품속에서 폭탄을 꺼내 던졌다. 일순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사이토에게 미치지 못했다. 사건은 연일 대서특필되며 대대적인 범인 수색이 시작됐고, 마침내 9월 17일 범인을 검거했다. 뜻밖에 그는 65세 노인이었다.왈우(曰愚) 강우규 의사.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일찍이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재산을 모았다. 젊은 시절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교한 뒤 고향을 떠나 학교를 세우고 민족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선생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때 이미 나이 오십을 넘겼건만, 나이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강우규 의사는 북만주 길림성에 학교와 교회를 지어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동포애와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동시에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세력을 연결하는 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3·1운동 발발 후에는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문화통치가 식민정책 강화 수단임을 꿰뚫어 본 후에는 신임 총독을 처단하는 것이야말로 민족독립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물론 선생의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이 죽지 않았다고 거사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립을 갈망하는 민족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이후 수많은 의열단과 비밀결사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선생의 거사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1920년 5월, 강우규 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11월 29일 서대문
일본민예관에서 마주친 조선 청화백자
현장보고 일본민예관에서 마주친 조선 청화백자 이웃나라 일본의 여러 공공 또는 개인 박물관에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소장한 곳이 많다. 일본 민예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설립한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도 그중 한 곳이다. 도쿄의 대표적 번화가 시부야 인근에 위치한 일본민예관을 최근 일본 출장길에 들렀다.가정집을 연상시키는 아담한 이 박물관은 일본은 물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예품 1만7,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선조들의 손길로 빚고, 고, 다듬은 조선시대 도자기를 포함해 1,600여 점에 달하는 한국산 목공예품과 금속공예품, 회화 작품 등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사진 촬영이 금지된 까닭에 지면을 빌어 소개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울 만큼 이 민예관의 한국문화유산 컬렉션은 출중한 민예품들로 가득하다. 실제 2 한 켠 조선반도 전시실을 둘러보던 중년 일본 여성들이 청화백자의 유려한 곡선에 탄성을 뱉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민예관 건너편 2 에는 목조건물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자택도 관람할 수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과 조선의 예술을 사랑해 ‘류종열(柳宗悅)’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물론 이에 대해 일제 강점기 문화 제국주의를 가장한 동정에 불과했다는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어쨌거나,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민중 예술품을 둘러보며 이국 땅에 발자취를 남긴 우리 선조들과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민예관                                                         ▲ 야나기 무네요시 자택
글/사진. 방정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