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중국 계몽주의 지식인 량치차오 그리고 조선 인식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광동성 신회(新會) 사람으로, 향신(鄕紳: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 또는 향촌의 퇴직 관리나 유력 인사로 이뤄진 사회 계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치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이 지나고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뒤, 서구의 충격이 한창 중국으로 물밀듯 거세게 쳐들어오던 시기였다.19세기에 들어서며 극심한 체제 이완과 서구의 충격으로 총체적 위기에 처한 중국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생존과 구국을 위한 변화를 모색했다. 특히 19세기 말 진보 지식인들은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치와 사상적 대응 논리를 정립했고, 문화 전반에서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켰다. 1880∼1890년대 가장 중요한 진보 정치 세력이자 지식인 집단은 바로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를 비롯한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낙후한 수구파와 양무파(洋務派)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욱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 패배를 계기로 그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하며 일종의 개량주의·계몽주의 사회 사조를 형성했다.서구 사상을 적극 수용해 부강한 민족국가 추구이러한 사조의 핵심 인물인 량치차오는 학술 사상적으로 경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금문공양학(今文公羊學) 기반 위에 사회진화론, 민족주의, 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 서구사상을 적극 수용해 개혁운동의 중요한 근원으로 삼고, 봉건왕조의 법제와 사회 개량을 주장했다. 특히 서구 제국을 모델로 삼아 총제적 개혁을 추진해 부강한 민족국가를 건립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량치차오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은 끝내 좌절하였고, 1898년 무술정변으로 변법유신이 실패하자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교훈 삼아 국민 개혁을 위해 학술, 사상, 문화 전반에 걸쳐 계몽운동을 전개해 당시에 커다란 호응을 얻었고 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글 최형욱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