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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호 뉴스레터
COVER STORY 사자(死者)를 위한 사자(使者)의 우아한 영접
사자(死者)를 위한 사자(使者)의 우아한 영접▲ 표지 그림 : 수산리 벽화고분 남벽 널방 입구 인물도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리에 위치한 고분의 벽화 중 널방 남벽에 그려진 벽화 그림이다. 무덤 입구에서 연도(무덤 입구와 널방 사이에 있는 통로)를 지나 만나는 널방 입구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벽화 속 세 인물은 머리에 검은 책(의례용 모자)을 쓰고, 황색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양쪽 끝 두 인물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산개(햇빛 가리개, 양산의 일종)를 들고 있다. 가슴 앞쪽으로는 황색 폐슬(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가슴에 늘어뜨려 무릎을 가리는 수건 모양의 헝겊)을 늘어뜨리고 있는데, 격식을 갖춘 차림새임을 짐작케 한다. 아마도 묘주의 출행에 의전을 담당하거나 무덤을 드나드는 이들을 영접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 아닐까 싶다.특별히 기둥에 그려진 연꽃 문양이나 인물들의 주변에 그려진 상서로운 구름 문양은 마치 이곳이 천상 세계나 극락으로 가는 길임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후세계로 가는 통과의례이며, 그 길에서 누군가 우리를 따뜻하게 안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고구려인들에게는 있었던 것일까.참고자료 : 동북아역사넷
"현실성 있는 정책 대안 개발 기능 강화를"
기고 "현실성 있는 정책 대안 개발 기능 강화를" 동북아역사재단이 내년이면 출범 1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재단은 한·일 간 일본군‘위안부’와 독도 영유권 문제, 동해 표기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상고사 문제 등 실로 다양하고 넓은 범위에서 자료를 발굴·조사하고 연구해 왔다. 한정된 인력과 예산으로 재단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독도가 우리 땅임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자료를 수집해 체계적으로 관리·전시하고 있는 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과문(寡聞)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단이 과거 역사 가운데 특정 분야 연구와 분석에 치중해 온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동북아역사재단설립에 관한 법률’에 나와 있듯 재단의 목적은 동북아 역사 및 독도 문제와 관련한 ‘장기적·종합적 연구·분석’과 ‘체계적·전략적 정책 개발’이다. 후자와 관련해 동법 제5조는 ‘전략·정책 대안 개발 및 대정부 건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재단이 이같은 설립 취지에 더욱 부응하려면 그간 했던 조사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개발하고 제시하는 기능이 좀 더 활성화돼야 할 것으로 본다.갈수록 커지는 동북아 전략 연구와 개발의 필요성그런 측면에서 이제 재단이 동북아 정책 관련 국내 최고 싱크탱크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한다. 싱크탱크는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이 대표적이다. 전세계 170여 개 국가에 5,500여 개 싱크탱크가 있는데 그 중 2,000여 개가 미국에 있고 그 가운데 400여 개가 워싱턴에 몰려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유독 싱크탱크가 발전한 이유로는 정부 밖 전문가들의 의견을 중시하고 신뢰하는 행정부, 다양한 목소리를 존중하는 다원주의 문화, 개인과 기업의 활발한 기부 전통, 풍부한 인력 자원등이 꼽힌다.우리나라는 문화와 전통이 미국과 달라 싱크탱크가 발전하는 일이 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재단이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장기적으로 추진하면 불가능하지만도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동북아 역사 문제에 관해 축적한 풍부한 연구 자료와 업
글 김낭기 (조선일보 논설위원·재단 자문위원)
"교류와 연대는 한·일 시민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보루'를 쌓는 일"
인터뷰 "교류와 연대는 한·일 시민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보루'를 쌓는 일" 지난 50년간 한·일 관계가 지금처럼 나빴던 적이 없다고 할만큼 두 나라 사이가 좋지 않다. 올해가 바로 ‘한일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은 기막힌 역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의 양식 있는 시민과 지식인들이 한·일 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는 점은 위안이다.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사무국장도 희망을 주는 일본인 중 한 사람이다. 지난 2월 13일 한국을 방문한 그를 김민규 홍보교육실장이 만나 대화를 나눴다_. 편집자 주야노 히데키 l ‘한일연대회복캠페인 2015’ 사무국장1990년대부터 전후 보상 운동에 참여하여 한국인 징용 노동자와 군인군속보상재판, 야스쿠니합사취소소송 등을 지원하고 있다. 2010년에는 한국의 시민운동과 공동으로 ‘식민지주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 채택에 앞장섰으며,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청산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임종국 상’을 수상하였다.김민규 이번 한국 방문 목적은?야노 히데키 두 가지다. 하나는 6월에 개최 예정인 ‘한일연대 회복캠페인 2015’와 관련하여 ‘한일시민선언실천협의회’ 등 한국 파트너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을 맞아 8월 15일에 발표 예정인 ‘아베담화’에 관해 일본, 한국, 동아시아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협의하기 위해서다. ‘아베담화’는 역사수정주의와 국제 안보에 더 많이 개입하겠다고 하는 이른바 ‘적극적 평화주의’를 표방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는 일본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므로 방치할 수 없다.김민규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이럴 때 시민사회 연대활동의 의미와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야노 히데키 한·일 정부 관계는 상호 신뢰가 무너져 정상회담을 열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다. 그러나 시민 차원에서는 전후보상 실현, 동아시아 평화 실현, 원전문제, 노동문제 등 많은 분야에서 교류와 연대를 계속해 오고 있다. 그중에서 전후보상 재판은 모두 패소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진행 김민규 (홍보교육실장)     정리 디자인집
평화의 소녀상 건립 위해 애쓰는 시드니 교민들한·일 과거사 시드니 심포지엄 참석 후기
연구소 소식 평화의 소녀상 건립 위해 애쓰는 시드니 교민들한·일 과거사 시드니 심포지엄 참석 후기 10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처음 마주한 시드니의 하늘은 청명했다. 한국은 겨울이라 30도에 이르는 호주의 날씨를 내 몸은 아직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옷차림을 보고 덥지 않느냐고 물어와도 그냥 ‘괜찮아요~ 아직 견딜만 해요.’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도착한 시간이 아침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시차가 두 시간이라 어제 저녁 비행기에 올라 잠도 제대로 못잔 채 밤을 보내고, 아침에 도착한 호주에서 일정을 시작하였다.바쁜 일정 탓에 이번 출장은 호주에 도착해서 출국까지 50시간이 주어졌다. 시드니총영사관에서 내준 차량으로 숙소에 도착하니 오전 8시 30분. 당초 체크인 시간은 오후지만, 좀 이른 체크인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한국에서 가져간 무거운 행사 자료집과 각종 자료는 호텔 로비에 맡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근처에서 체크인까지 5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부족한 발표 자료를 다듬고, 전달할 내용과 자료를 하나라도 더 찾는 것으로 보냈다.활발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호주는 면적이 한반도의 약 35배에 이르는 나라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군인을 한국전쟁에 파병하였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유무역 등 기본 가치와 글로벌 이슈에 대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면서 서로 지지하는 협력동반자 국가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중 네덜란드계 호주 출신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가 호주에 살고 있어 한인회와 유학생 등이 ‘위안부’ 피해자 지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호주에서 일본군‘위안부’ 관련 의회 결의안을 채택한 게 2007년 9월로 벌써 8년이 지났지만, 결의안 채택과 피해자 지원 활동을 아직 기억하는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1953년 시드니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1961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60여 년 동안 한국은 호주의 3대 수출국(중국, 일본에 이어)이자 4대 교역국, 호주는 우리의 7대 교역국이자 자원·에너지 분야 최대 투자국이 되었다. 한·호주 FTA 체결
글 정은정 (홍보교육실 행정원)
갈림길에 선 소위 '다케시마의 날' 행사
보고서 갈림길에 선 소위 '다케시마의 날' 행사 지난 2월 22일, 시마네현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다케시마의 날’ 행사가 진행되었다. 2005년 시작된 이 행사가 올해는 10주년 행사로 치러졌다. 행사의 핵심은 이 날 오후 시마네현민회관에서 열린 ‘다케시마의 날’ 기념행사였지만, 이를 앞두고 오전 행사장 주변에서 벌어진 요란한 시위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매년 2월 22일이 되면 시마네현 마츠에시의 시마네현민회관 주변은 오전부터 떠들썩하다. 한국의 독도 관련 시민단체 대표들이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항의하는 뜻으로 그 부당성을 적은 플래카드를 펼쳐 보이거나 구호를 외침으로써 일본의 독도 강탈 의도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해왔는데,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익들이 격렬하게 항의하여 부르짖는 확성기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양측이 물리적으로 부딪히지 않도록 하고자 필사적으로 제지하는 경찰들의 힘겨운 움직임이 어우러져 주변은 매번 아수라장이 되었다.이 날도 행사장 주변은 이 같은 시위 소음으로 가득 찼다. 여기에 100여 대에 이르는 우익 시위차량 행렬까지 더해져 마츠에시는 연중 가장 소란한 하루였을 것이다. 이러한 광경이 매년 되풀이되면서 10년 세월이 흘러 어느 덧 정기 행사처럼 굳어지고 있다. 우익들의 기세는 올해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느껴졌다.그러나 민단관계자들은 예년처럼 시마네현민회관 주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우익들의 행동을 경계하던 경찰의 모습이 올해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했다. 그 이유는 올해 ‘다케시마의 날’ 행사 항의 차 도일한 시민단체 대표가 독도수호전국연대 최재익 대표의장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우익들의 정보 취합 능력 부족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최대표와 대동한 5명 안팎의 시민단체 사람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우익들 100여 명이 집결하여 격렬히 항의하는 모습이나 시위차량 100여 대 행렬이 시내를 배회하며 확성기로 소음을 쏟아내는 것은 누가 봐도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마츠에시 시민들이 우익들의 이러한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당
글 이명찬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중국 계몽주의 지식인 량치차오 그리고 조선 인식
역사인물 중국 계몽주의 지식인 량치차오 그리고 조선 인식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광동성 신회(新會) 사람으로, 향신(鄕紳:중국에서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 또는 향촌의 퇴직 관리나 유력 인사로 이뤄진 사회 계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치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이 지나고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뒤, 서구의 충격이 한창 중국으로 물밀듯 거세게 쳐들어오던 시기였다.19세기에 들어서며 극심한 체제 이완과 서구의 충격으로 총체적 위기에 처한 중국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생존과 구국을 위한 변화를 모색했다. 특히 19세기 말 진보 지식인들은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치와 사상적 대응 논리를 정립했고, 문화 전반에서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켰다. 1880∼1890년대 가장 중요한 진보 정치 세력이자 지식인 집단은 바로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를 비롯한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낙후한 수구파와 양무파(洋務派)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욱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특히 청일전쟁(1894∼1895) 패배를 계기로 그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하며 일종의 개량주의·계몽주의 사회 사조를 형성했다.서구 사상을 적극 수용해 부강한 민족국가 추구이러한 사조의 핵심 인물인 량치차오는 학술 사상적으로 경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금문공양학(今文公羊學) 기반 위에 사회진화론, 민족주의, 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 서구사상을 적극 수용해 개혁운동의 중요한 근원으로 삼고, 봉건왕조의 법제와 사회 개량을 주장했다. 특히 서구 제국을 모델로 삼아 총제적 개혁을 추진해 부강한 민족국가를 건립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량치차오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은 끝내 좌절하였고, 1898년 무술정변으로 변법유신이 실패하자 량치차오는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교훈 삼아 국민 개혁을 위해 학술, 사상, 문화 전반에 걸쳐 계몽운동을 전개해 당시에 커다란 호응을 얻었고 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글 최형욱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17세기 몽골인들이 직접 쓴 유목민의 삶과 역사
재단 새 책 17세기 몽골인들이 직접 쓴 유목민의 삶과 역사 ▲ 저자 미상│김장구 역주│2014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2014년 11월에 《역주 몽골 황금사》(김장구 역주)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17세기 몽골 고대문자(Mongol bichig)로 기록한 《코리양코이 알탄 톱치(Quriyangɤui Altan Tobči, 황금사)》를 번역한 것이며, 그 내용은 칭기스 칸(Chinggis Khan)의 소위 ‘황금가문(Altanurag)’ 가계(家繼)에 관한 것이다.이 책의 원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97년이다. 그때까지 원전은 고비-알타이 아이막에 거주했던 유목민 바트멘드(Batmend)의 조상들이 대대로 소장해 왔으며, 그가 같은 고향 후배인 초이마(Sh. Choimaa) 교수에게 제공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초이마 교수는 오랜 기간 연구한 끝에 몽골 고대문자로 기록된 이 역사서를 모두 현대몽골어로 전사하여 2002년에 간행하였고, 2011년에는 역주와 색인, 원본 사진본을 포함해 완전한 연구서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이 책의 저자와 편찬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학자들은 17세기 초에 간행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알다시피 몽골인이 직접 손으로 쓴 몽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몽골비사(元朝秘史)》인데, 안타깝게도 이 책의 몽골어 원본은 현전하지 않고, 몽골어를 한자로 음역(音譯)하여 적은 전사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때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약 3세기 동안 몽골인이 남긴 몽골어 문헌 사료는 현전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소위 《황금사(Altan Tobči)》는 《몽골비사》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몽골 역사서이자 가장 오래된 몽골문 사료인 셈이다.‘동북아시아 지역사’ 위한 한·몽 역사가들의 협력재단은 설립 후, 중국의 한국사 왜곡에 적극 대응하기 위하여 몽골, 러시아, 베트남 등 학술기관들과 MOU를 체결하고, 정기적으로 공동 학술 조사와 학술 회의 등을 개최하면서 동북아시아, 나아가 중앙 유라시아 지역과 민족사 인식을 서로 공유하고자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몽골과는 이미 2007년에 포괄적 학술
글 장석호 (역사연구실 2팀장)
"재단의 최고 전략은 전문성 축적"
기고 "재단의 최고 전략은 전문성 축적" ▲ 위. 독도연구소 개소 2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이훈 명예 연구위원▲ 아래. 지난 12월 31일 퇴임식에서 김학준 이사장에게     꽃다발을 받는 이훈 명예 연구위원동북아역사재단 근무 8년 만에 ‘정년퇴임 1호’가 되었다. 사실 이 ‘1호’라는 것 때문에 원고라도 부탁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걱정대로 되어버렸다. 처음이라니 어쩌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궁시렁(?)거려 본다.재단 근무 8년은 이전 직장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근무했던 기간과 비교하면 절반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고, 근무 환경이나 업무 내용도 많이 달랐다. 나이 들어 옮긴 직장이었지만 동북아 역사와 관련 있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던, 개인적으로는 역동적으로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내내 긴장을 풀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다. 왜 그렇게 긴장했을까? 우선은 시간적으로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사안을 다뤄야 하는데서 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전선(戰線)에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탄환은 가져오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재단에 오기 전까지는 연구자로서 아주 편한 시간을 보냈다. 곰팡이 냄새가 가시지 않은 문서를 만지면서 성과를 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신껏 논문을 쓰던 시절이었다. 바로 지금 일어난 일도 정확히 분석하기가 어려운데 옛날 사료만 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몇백 년 전 일어난 일을 그럴 듯하게 쓰다 보면 어느 때는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시정거리가 점술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앞선 연구자들과 다른 새로운 얘기를 하면 좀 어떤가? 그렇게 해석한다는데! 참 마음 편하던 시절이었다.백화점 식 대응에서 비롯한 피로감그런데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 바로 얼마 전 근대 역사를 연구하는 재단에 오고 나니 사정이 달랐다. 재단에서는 일본과 역사 현안을 다루는 제1연구실, 조직개편 후 역사연구실, 그리고 독도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일본교과서 기술,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지금 현
글 이 훈 (한림대 연구교수·재단 명예 연구위원)
종로구 내자동 한성임시정부 유적지
현장보고 종로구 내자동 한성임시정부 유적지 ▲ 경복궁역 7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     표지석3·1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이 분출된 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지도자들의 투옥은, 향후 더욱 체계적인 독립운동 조직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갖게 했다.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필두로, 4월 13일에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내에서는 한남수, 홍면희 등이 뜻을 모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 및 종교계 지도자들과 정부수립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당시 현직 검사였던 한성오 집에 모여 국민대회취지서와 임시정부 약법을 만들고 서울에서 임시정부 수립 선포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마침내 1919년 4월 23일. 종로구 서린동의 봉춘관에서 13도 대표 24명이 국민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서울 곳곳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며 이를 알렸다. 한성임시정부는 민주제와 대의제를 기초로 한 약법(約法)을 공포하고, 집정관 총재 이승만을 필두로 12명의 정부 각료를 임명했으며, ‘국민대회취지서’를 통해 일본 정부의 통치권 철거와 군비 철퇴, 일본관청 납세 거부 등을 결의했다. 이를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이 보도하면서 국외에도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이 알려졌다.▲ 국민대회 취지서                  이미지 제공 : 독립기념관이후 1919년 9월 6일, 각지에 흩어져 수립된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한성임시정부는 절차적 정당성과 탄탄하게 구성된 조직을 인정받아 통합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각료로 계승되었다. 비록 4개월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임시정부의 근간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고 일제 치하 서울 한복판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는 커보인다.올해는 한성임시정부 수립 96주년이 되는 해다. 경복궁역 7번 출구 인근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한성오 집터에 ‘한성정부 유적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 교토시 조선 병사 코무덤
현장보고 일본 교토시 조선 병사 코무덤 지난 1월 방학을 맞아 가족과 함께 일본 교토를 찾았다.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제4권을 읽고 꼭 한 번 교토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알다시피 교토에는 수많은 역사 유물과 유적이 있고, 한반도와 관련있는 것들도 많다. 물론 한·일 두 나라가 사이 좋게 지내던 흔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중 하나가 코무덤이다.일본군은 정유재란 당시 결사 항전했던 남원 사람들의 코와 귀를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가 이 곳 교토에 묻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조선 병사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바친 이 잔인한 행태는 1597년부터 두 달간 가장 많이 행해졌다는데, 특히 남원성 전투에서 벤 코는 무려 3,276개나 된다고 전한다.코무덤을 둘러보던 날, 바로 옆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豊國) 신사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조상의 원혼이 잠든 코무덤 너머로 보이는 교토타워를 올려다보며 어쩔 수 없는 이질감에 씁쓸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김 효(교사·서울시 성동구 왕십리2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