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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와 동양 평화
역사인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와 동양 평화 의거 후 체포된 윤봉길 의사일본 도쿄의 야스쿠니신사 옆에 유슈칸(遊就館)이 있다. 이곳은 일본이 태평양전쟁 까지의 침략전쟁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일종의 전쟁기념관이다. 피해를 입은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볼 때 침략의 역사임에도 그들은 ‘자랑스런 영광의 역사’ 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0년도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혈흔이 묻은 군복을 유리관 속에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윤봉길의거 때 사망한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의 군복이었다. 시라가와는 1932년 상해사변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라 하여 일본에서는 육군의 ‘신’ 으로까지 숭앙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일본 왕은 그가 죽기 전에 남작 작위와 욱일대훈장을 내리는 등 최고의 예우를 다하였다. 윤봉길의사가 대륙 침략의 원흉으로 여겨 처단한 그를 일본은 전쟁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었다. 누구의 지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지난 뒤 그곳에 다시 갔더니 그 군복은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농민운동가에서 혁명운동가로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도한 일본신문기사올해는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윤봉길은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보통학교를 자퇴한 후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접하고 한 사람의 무지는 무덤을 잃게 하지만, 민족의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하였다면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와 개벽 잡지를 구독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아울러 민족문제를 직시한 그는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평등과 자유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자유는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며 농민과 노동자의 민중적 자유 운동이 효과적임을 주장하였다. 농민회와 위친계를 조직하여 농산물의 재배법을 개선하고 공동판매를 실시하는 등 농가의 소득증대운동을 펼쳤으며, 월진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경제향상을 꾀했다.그가 의욕적으로 실시한 농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것은 19
김상기 충남대 교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