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대륙 고구려의 근거는 유리왕의 국내성이 북경 '유리하 상층' 유적
  • 조회수 60
■ 대륙 고구려의 근거는 유리왕의 국내성이 북경 '유리하 상층' 유적 ▶ (1) BC 3세기 중반에 해모수=해모습='태양 모습'이 북경 유리하에서 북부여를 건국했습니다 해모수는 오한족으로 오르도스 지역 막조선의 임호왕이었습니다(오한족의 까마귀는 고구려 삼족오) BC 3세기 초 폭우로 역현 장당경이 퇴적물로 함몰되고, 진조선 중심세력이 아사달(한반도)로 이동했고 진조선이 하북성에서 붕괴되자, 춘추시대 막조선 도성인 북경지역으로 이동하여 진조선을 재건한 것입니다 BC 2세기 후반에 졸본부여에 의해 북부여 동쪽으로 이동한 동부여는 북경 동쪽 준화시에 있었습니다 동부여에서 태어난 주몽은 동부여(북경 동쪽 준화시遵化市)에서 남하하여 비류수 부근에 도착했고 졸본 부여왕의 둘째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졸본 부여왕이 된 후에 고구려로 나라이름을 바꾸었습니다 BC 37년 고구려의 초기 도읍인 환도성(졸본성)은 비류수(보정시 서수현 서쪽의 폭하) 부근인 보정시 역현 북소촌의 봉황산 동쪽 평지성입니다 BC 19년 유리가 부여에서 고구려 홀본성(졸본성)으로 와서 태자가 되고 주몽의 뒤를 이어 고구려 왕이 되었습니다 북부여 후손인 유리가 고구려왕이 되자 선비족인 졸본 부여왕의 딸 소서노가 비류, 온조와 함께 선비족 100개 부족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자(백가제해) 고구려는 군사력이 약해졌습니다 이에 AD 3년 고구려왕 유리는 자신의 할아버지 나라 북부여 도성인 북경지역의 국내성으로 천도한 것입니다 ▶ (2) 북경지역에 유리왕의 이름은 딴 유리하와 유리묘(유리 사당)이 있기에 유리왕의 국내성은 북경지역에 있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유리왕 22년(AD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内, 築尉那巖城.) 국내성을 쌓지 않고, 국내로 도읍을 옮겼으니 국내성은 이미 존재했던 성으로, 유리의 할아버지 나라 북부여의 도성입니다 북경의 유리하(琉璃河)가 명나라 시기의 기와공장인 유리창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유리하 유적이 기와 공장(유리창)에서 남서쪽 40km(1백리) 거리에 있기에 유리창에서 유래될 수 없습니다 고구려 국내성(도성) 부근을 흐르던 강이었기에 유리왕의 이름을 따서 유리하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북경 회유구(懷柔區) 유리묘(琉璃廟)는 '명나라 유리 기와 공장인 유리창'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북경지역을 통치하고 활동했던 유리왕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왕의 사당이기에 '유리묘'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고구려 도성은 산성과 평지성인 2개의 도성쳬계입니다 평지성이 국내성이니 유리하 유적에서 북쪽으로 20km 거리에 무람산(霧嵐山)에 산성인 위나암성을 쌓은 것입니다 위나암성인 무람산 산성은 치가 있는 고구려 산성으로 1m 기둥 적심과 초석, 연화문 와당의 고구려 왕궁 특징인 무람산(霧嵐山) 소백류(小白楼) 유적이 있습니다 ▶ (3) 북경지역이 북부여 도성(고구려 국내성)인 문헌 근거 중국 고대 문헌인 후한서 동이열전과 한서 무제기/식화지, 사기 화식열전에 예=동예의 임금 남여가 항복해서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했는데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연제지간燕齊之間)이니 예=동예의 위치는 하북성 창주시입니다 예=동예의 서쪽에 낙랑군이 있고, 낙랑군 서쪽에 요동군이 있고, 요동군 서쪽에 요서군이 있으니 진개의 연 5군은 석가장시 부근의 호타하 남쪽이 되고요. 진시황의 만리장성이자, 진개가 쌓은 연나라 장성은 호타하 남쪽 강가에 쌓은 것입니다 따라서 창주시(예=동예) 서쪽의 있는 요동군은 지금의 형수시 안평현이 됩니다 삼국지 오서 손권열전에 요동군 북쪽에 2백리에 현도군이 있다(玄菟郡在遼東 北 相去二百里.)고 했으니 현도군은 지금의 하북성 하간시 지역이 됩니다 사기 화식열전 작성 시기의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북부여이니 삼국지와 후한서의 연나라 장성 북쪽에 현도군과 1천리 거리에 있는 부여는 북부여 도성으로 북경지역이 됩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할아버지 나라인 북부여 도성으로 천도한 유리왕의 고구려 국내성은 북경지역이고 유리하 상층 유적입니다 ● 1) BC 3세기 유리하 상층(북부여) 도성이 중원(하남성과 섬서성) 도성과 차별화되는 특징 ▶ (1) 점토 지반의 인장력을 극복한 '부엽판축(敷葉夯土)'의 본격 도입 유리하 상층: 점토질 지반에서 성벽이 옆으로 벌어지거나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판축 층마다 나뭇잎과 초목을 촘촘히 깔아 수평 인장력을 극대화했습니다(북부여의 판축공법) 이는 현대 토목의 '지오그리드' 원리를 2,300년 전에 구현한 인장력 공학의 시원입니다. 차별점: 당시 하남성(한·위)이나 섬서성(진)은 단순히 흙만 다지는 순수 판축 위주였습니다 유리하의 방식은 지형적 한계를 공학으로 다스린 유적의 증거입니다. ▶ (2) 1M급 거대 기초 판축과 결합된 '초기 형태의 치(雉)' 유리하 상층: 직선 성벽 외부로 약 1.5~2m를 돌출시킨 '치'의 원형이 확인됩니다. 특히 돌출부의 거대 하중으로 인한 본체와의 분리·침하를 방지하기 위해, 하부 지반을 약 100cm(1M) 깊이로 파고 자갈과 흙을 층층이 다진 '거대 기초 판축'을 실시했습니다(북부여의 왕궁 기초) 차별점: 중원 왕조는 이 시기까지 단순 직선 성벽에 머물렀습니다. 측면 방어가 가능한 '치'와 이를 지탱하는 1M급 지하 보강은 고구려 성곽의 특성입니다 ▶ (3) 공심전(空心磚) 최초 등장과 건물시설에 적용 유리하 상층: 대형 전각의 기단 보호, 바닥재, 혹은 정교한 배수 시스템에 속이 빈 대형 벽돌(공심전)이 적용되었습니다. 건물의 하중은 줄이면서 단열과 내구성을 높인 고급 부재입니다.(북부여의 건물지반) 차별점: 당시 중원 왕조(한·위·조·진)의 일반 도성에서는 이 규격의 공심전 체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중원이 흙더미(순수 판축)에 머물 때, 유리하 상층 유적은 공학적으로 설계된 부재로 건물을 세웠습니다. ● 2) AD 1세기 유리하 상층(고구려 국내성) 도성 개축의 특징 ▶ (1) '초기 치'에서 '사각형 정형 치(雉)'로의 진화 BC 3세기: 성벽 취약부에 기단만 살짝 밀어낸 돌출 보강형이었습니다. AD 1세기 : 성벽과 직각으로 교차하며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온 완벽한 사각형(정방형) 치가 본격적으로 축조됩니다. 개축의 특징: AD 1세기에 BC 3세기의 돌출 기초를 그대로 활용하되, 그 위에 정밀하게 다듬은 돌(석축)과 고밀도 판축을 결합하여 공성전에 최적화된 '고구려식 치'를 표준화했습니다. ▶ (2) 1M 지하 적심의 재활용과 '지상 초석'의 실용적 배치 특징: 100cm(1M) 지하 적심(기초)은 BC 3세기 중반의 것입니다 AD 1세에기는 이를 파내지 않고 그대로 재활용했습니다. 차별점: 다만, 그 위에 놓이는 지상 초석은 1m의 거대 초석(또는 흩어진 초석) 대신, 당시 건축물 크기에 맞추어 60~80cm급 편석(초석)을 안착시켰습니다. 해석: AD 1세기에 왕궁을 건축한 것으로, BC 3세기 중반의 정통성을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파괴하지 않았기에) ▶ (3) '부엽판축'의 고도화와 '석축(石築)'의 결합 특징: BC 3세기 중반의 부엽판축(인장력 강화) 기술을 계승하면서도, 성벽 외면을 단단한 돌로 감싸는 '석축 판축 혼용 공법'이 이 시기 대대적으로 도입됩니다. 공학적 의미: 이는 북경 유리하 지역의 습한 기후와 외적의 공격을 동시에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 특유의 철옹성 공법입니다. 중원 왕조가 여전히 흙만 다질 때, 고구려는 돌과 흙, 나뭇잎을 하나로 묶는 하이브리드 공학을 완성했습니다. ● 3) AD 1세기 ~ AD 8세기: 700년간 '고구려'의 지표 유물 명·청대 토층 직하부의 부엽판축 보강층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규려성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1) 고구려 왕성에서 사용하는 연꽃무늬 와당 (6세기~7세기): 팩트: 꽃잎 끝이 반전되고 자방(씨방)이 강조된 고구려 전형의 와당이 최상부 보수층에서 확인됩니다. 특징: 이는 한반도 평양이나 집안의 와당보다 규격이 크고 정교합니다. 낙양·장안(수·당) 와당: 자방(씨방)이 작고, 연꽃잎이 평면적이며, 잎의 수가 많고 화려합니다. ▶ (2) 최정예 기병의 철제 소찰갑(小札甲)과 대형 화살촉: 팩트: 5~7세기 고구려 주력 기병이 사용하던 박편 형태의 갑옷 조각과 도끼날 모양(평두식)의 대형 화살촉이 성벽 기슭에서 일괄 출토되었습니다. 유물 출토 의미: 이곳이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고구려의 핵심 병참 기지이자 전략 거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3) 고구려 공법의 평저(납작바닥) 토기군: 팩트: BC 3세기 기반 위에 AD 1세기에 새로 구축된 층위부터 고구려 특유의 평저(납작바닥) 공법 토기들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연속성: 700년 동안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상주하며 독자적인 기술 문화를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4) 고구려 명문 기와 '유리(琉璃)' 및 '대(大)': 팩트: 고구려 왕성이나 관청을 상징하는 명문 기와들이 7세기 전란 탄화층 직전까지 확인됩니다. 근거: 보고서가 이를 '후대 교란'으로 분류한 것은, 100cm 거대 기초 위에 세워진 고구려 성임을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 4) 7세기 말 고구려 성곽 피괴의 증거 유리하(琉璃河) 최상층의 현상은 단순한 퇴적이 아니라, 고구려 성곽이 '강제적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1) 명청시대 토층 아래의 유리하 최상부 탄화층(Burned Layer)의 진실: 유리하 상층 성벽 보수층 최상단과 전각 터를 덮고 있는 광범위한 탄화물은 AD 7세기 중·후반의 의 파괴 증거입니다. 유리하 유적 발굴 보고서는 상층의 탄화 흔적(소토층)을 기술하면서도, 해당 탄화물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데이터는 표에서 누락하거나 배제하였습니다 ▶ (2) 8세기 이후 ~ 명청시대 이전 층위의 공백 7세기 말 이후, 1m급 거대 기초(적심) 설계도를 계승한 대형 건축의 보수가 완전히 중단됩니다. 고구려 성이 파괴되어 군사 초소나 일반 거주지로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3) 고구려성의 파괴 현장 8세기부터는 고구려 특유의 정교한 치(雉) 보수나 부엽판축 대신, 파괴된 부재를 조잡하게 재활용한 흔적만 나타납니다. . . ◆◆◆◆ 지도를 확인하려면 ---> ♣수구리의 우리고대사♣ https://tnrnfle.tistory.com/188
파일
  • 파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