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환도성과 졸본성(비류수 부근)은 하북성 '역현 북소촌 봉황산'의 동쪽 평지성
※주) '졸본성'을 북위서 고구려열전에 '홀승골승=홀본성'으로 기록함,
1) 홀승골은 몽고 홉스골의 한자표현으로 몽고어로 '푸른 호수'인 하북성 '백양정'
2) BC 24세기 소빙기 한랭화가 시작되자
몽고 홉스골에서 선비족의 먼 조상이 동남하 하여 산서성/하북성 북부로 내려와 홍산인과 조우하고
시마오 유적-> 주가구 문화-> 유리하 하층의 막조선 세력이 됨(유전자 분석 결과)
3) 선비족인 색리국=색족의 동명왕이 하북성 푸른호수인 백양정 부근의 성을 홀승골성이라 함
▶ (1) 해당유적의 고고학 발굴 보고서의 내용은 삼국사기 등의 문헌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니
하북성 역현 북소촌 봉황산의 동쪽 평지성은 환도성이자 졸본성입니다
▶ (2) 삼국유사 왕력편에 AD 342년 '故國原王 壬寅八月 移都 安市城, 即丸都:안시성이 환도'입니다
고구려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양성체계이니 평지성은 환도성, 산성은 안시성이었습니다
▶(3) 비류수 부근에 환도성과 졸본성이 있으니 환도성이 졸본성입니다
환도성에 거주한 동천왕이 AD 246년 관구검과의 처음 전투한 장소가 비류수 부근이며
주몽이 비류수 부근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했으니, 환도성이 졸본성입니다
▶(4) 비류수(沸流水)는 沸(끓을 비, 용솟음칠 불), 流(흐를 류), 水(물 수) : 용솟음치며 흐르는 물(강)이고
폭하(瀑河)는 瀑(폭포 폭, 용솟음칠 팍), 河(물 하) : 용솟음치는 물(강)입니다
따라서 고대 비류수(沸流水)는 하북성의 폭하(瀑河)가 됩니다
태행산맥에서 발원하는 폭하(瀑河)는 역현 남부를 지나 서수현을 거쳐서 백양정으로 들어 갑니다
▶(5) 하북성 역현 북소촌 봉황산의 동쪽 왕궁터와 제사유적에서 기둥의 1m 적심구조와 왕궁 초석이 확인되고,
봉황산 산성과 동쪽 평지성벽에서 고구려 성곽의 전형적인 방어 시설인 치(雉)의 구조가 확인됩니다.
또한 하북성 역현 북소촌 봉황산 유적 일대에서
고구려 형식의
육엽(6잎) 또는 팔엽(8잎) 연화문 적색 와당과
삿무늬(승문)토기,나팔입 항아리(광구호), 네 귀 달린 단지(사이부호)가 출토되었습니다
●1. 졸본성과 환도성의 문헌 내용(삼국사기, 삼국유사, 북부여기)
▶(1) BC 3세기 중반에 해모수=해모습='태양 모습'이 북경 유리하에서 북부여를 건국했습니다
해모수는 오한족으로 오르도스 지역 막조선의 임호왕이었습니다
BC 3세기 초 폭우로 역현 장당경이 퇴적물로 함몰되자, 진조선 중심세력이 아사달(한반도)로 이동했고
진조선이 하북성에서 붕괴되자, 춘추시대 막조선 도성인 북경지역으로 이동하여 진조선을 재건한 것입니다
BC 2세기 후반에 졸본부여에 의해 북부여 동쪽으로 이동한 동부여는 북경 동쪽 준화시에 있었습니다
동부여에서 태어난 주몽은 동부여(북경 동쪽 준화시遵化市)에서 남하하여 비류수 부근에 도착했습니다
▶(2) BC 2세기 후반에 동명왕이 졸본성(보정시)에서 졸본부여를 건국했습니다(동명왕은 색리국=색족으로 선비족)
BC 1세기 중반에는 비류수 부근의 졸본부여에 도착한 주몽은 졸본부여 둘째 딸(소서노)와 결혼했습니다
졸본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고, BC 37년에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세웠습니다(나라 명칭 변경)
BC 34년에 주몽이 도성과 궁실을 지었다고 했으니 졸본부여의 졸본성을 중창한 것입니다
▶(3) AD 3년에 유리왕이 국내성( 북경 유리하)으로 천도하여, 강력한 고구려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북부여 후손인 유리가 고구려왕이 되자 졸본 부여왕의 딸 소서노가 비류, 온조와 함께
선비족 100개 부족(백가제해)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자 고구려는 군사력이 약해졌습니다
이에 고구려왕 유리는 자신의 본거지인 북경지역의 국내성으로 천도한 것입니다
▶ (4) AD 209년 산상왕이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도성을 옮겼습니다
AD 246년 동천왕이 관구검과의 처음 전투가 비류수 부근이니 환도성이 곧 졸본성입니다
고구려의 초기 도읍인 비류수 부근의 졸본성으로 도성을 옮긴 것입니다
▶ (5) AD 246년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어 동천왕이 진황도시의 남옥저=동옥저로 피난 갔습니다
동옥저에 머문 동천왕은 동옥저 서부의 개마대산(지금의 갈석산) 동쪽에 평양성을 쌓고
AD 247년에 동천왕이 평양성(진황도시 무령현)으로 도성을 옮겼습니다
▶ (6) AD 342년 2월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보수하고 거쳐를 옮겼는데 도성을 옮긴 것입니다
같은해 11월에 전연의 모용황이 침입하여 왕궁이 불타고 환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 (7) 삼국유사 왕력편에 AD 342년 '故國原王 壬寅八月 移都 安市城, 即丸都:안시성이 환도'입니다
고구려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의 양성체계이니 평지성은 환도성, 산성은 안시성이었습니다
AD 342년 관구검에 의해 환도성이 피괴되었기에
고구원왕 이후의 환도성은 도성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안시성은 방어성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AD 546년 고당 전쟁시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때
최소 10만명의 당나라 군대 공격을 막아낸 안시성은 방어성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것입니다
● 2. 하북성 역현 북소촌 봉황산 동쪽의 평지성의 고고학 발굴 보고서 내용
▶ (1) 고고학적 확인: 북소촌 봉황산의 동쪽 평지성의 왕궁터와 제사유적에서 1M 적심구조와 왕궁 초석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고구려 초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두꺼운 와당 파편들이 확인되고
봉황산 산성과 동쪽 평지성벽에서 고구려 성곽의 전형적인 방어 시설인 치(雉)의 구조가 확인됩니다
또한 하북성 역현 북소촌 봉황산 유적 일대에서
초기 층위(BC 1세기~AD 1세기)에서는 고구려의 삿무늬(승문)토기와 나팔입 항아리(광구호)가 확인되고
후기 층위에서는 고구려식 적색 와당과 네 귀 달린 단지(사이부호)가 출토됩니다
▶ (2) 구조적 특징: 일반적인 군사 요새(보루)에서는 보기 힘든 대형 정면 칸수를 가진 건물터가 발견되었다는 점은
이곳이 단순한 평지성이 아니라 '왕궁'의 기능을 수행했음을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또한 산성과 평지성에서 치가 확인되고, 고구려 특징의 기와 및 토기가 발견된 것은
산성과 평지성이 고구려 도성임을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1) 동명왕의 졸본부여 시기와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 졸본성 시기(BC 2세기 후반 ~ BC 19년)
(1) 기록: BC 2세기 후반에 동명이 색리국에서 남하하여 졸본성에서 졸본부여를 건국했고
주몽이 동부여에서 남하해서 비류수 근처의 졸본부여 왕위에 올르고 나서
BC 37년에 고구려로 개명하고, BC 34년에 졸본성을 중창했습니다
(2) 봉황산 동쪽 평지성 건설 시기: 왕궁터와 제사유적 지하에서
BC 160~AD 30년의 방사성 탄소년대는 졸본부여 건국과 주몽의 졸본성 중창시기와 일치합니다
▶▶2) 산상왕 시기: 환도성 수축(AD 197년 ~ 227년)
(1)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도성을 옮기고(AD 3년)
산상왕이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AD 209 년)했습니다
(2) 봉황산 동쪽 평지성의 주거지 확장 :
초기 왕성(동명왕~유리왕)의 대형 격자형 중심도로 외곽으로 주거 구역이 대폭 확장된 것이 확인됩니다
확장된 격자형 도로의 기초 판축 지반과 신규 주거지 지층에서
AD 3세기 초반의 방사성 탄소 연대가 집중적으로 확인되니 산상왕이 환도성을 쌓은 기록을 뒷받침합니다
▶▶3) 동천왕 시기: 전쟁으로 인한 환도성 파괴와 긴급 복구 (AD 227~248년)
(1) 기록: 삼국사기 동천왕 20년(246년), 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도륙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고고학적 팩트 (연대 AD 220~260년):
층위 변화: 왕궁터 주변 주거지 층위에서 3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대규모 화재 흔적(탄화물)이 발견됩니다.
보수 흔적: 3세기 중엽의 탄화층과, 이를 긴급히 수습하기 위해 기존 도로 위에 덧씌워진 점토 보수층에서
채취한 시료의 탄소 연대가 3세기 중엽을 가리킵니다.
결론: 관구검 침공으로 파괴된 환도성을 동천왕이 다시 수습한 물리적 증거입니다
▶▶4) 고국원왕 시기: 대대적 증축 (AD 331~371년)
(1) 기록: 고국원왕 12년(342년), 환도성을 수축하고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고고학적 팩트 (연대 AD 330~360년):
성벽 보강: 봉황산 산성과 평지성의 기존 판축 성벽 외벽에
기단석(대형 할석)을 덧대어 보강한 석축+판축 혼용 구조가 4세기 중반 층위에서 확인됩니다
탄소 연대: 보강된 성벽 하단 기단부의 유기물 측정 결과 4세기 중반으로 나타납니다
결론: 전연의 침공에 대비해 고국원왕이 환도성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행한 대대적인 성곽 개축의 결과물입니다
▶▶5) AD 342년 전연에 의한 환도성 파괴 이후 평지성의 성격 변화
(1) 기록: 고국원왕 12년(342년) 전연(모용황)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고고학적 팩트: 북소촌 평지성 유적의 4~6세기 층위에서 발견되는 온돌은 주로 'ㄱ'자형 혹은 직선형 쪽온돌입니다.
화려한 전각 중심에서 실전용 병영 주거지(온돌 시설 완비)로의 전환입니다
(3) 분석: 전연에 의해 환도성이 파괴되자, AD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요양)으로 도성을 옮긴 후
옛 수도였던 이곳이 병력과 그 가족들이 상주하는 거대 군사 거점 및 배후 거주지로 기능이 전환된 것입니다
▶▶6) AD 645년 봄, 당군 침공 직전의 평지성 포기 및 산성 집결
(1) 실측 팩트: 봉황산 산성 내부에서는 7세기 중반에 급조된 군사용 보루와 저장고 흔적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2) 전술적 정합성: 당나라 대군이 몰려오자 평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구려군이
'청야 전술'의 일환으로 평지 거주 시설을 비우고 봉황산 산성으로 이동해 공격에 대비한 것입니다
▶▶7) AD 645년 7월, 평지성 주거지의 파괴와 당군의 임시 막사화
(1) 결정적 고고학 팩트: 북소촌 평지성의 고구려 주거 층위 바로 윗면에서, 고구려식 가옥을 파괴하고
그 위에 덧씌워진 당나라식 대형 천막 자리와 당나라 군용 토기(대형 솥 등) 파편들이 대량 발견됩니다
(2) 층위 분석: 이는 당나라 군대가 점령한 평지성을
당나라의 공성 기지 및 병영(막사)으로 개조하여 사용했음을 입증하는 명확한 층위적 증거입니다
고구려군의 생활 터전이 당군의 침략 거점으로 바뀐 비극적 현장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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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를 확인하려면 ---> ♣수구리의 우리고대사♣ https://tnrnfle.tistory.com/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