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된 역사: 영화 <안시성>과 '안시성 전투'
  • 작성일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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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안시성과 '안시성 전투' - '안시성 전투'는 645년 발발한 고구려와 당의 전쟁을 끝맺는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2018년 이 안시성 공방전을 재현한 영화가 개봉했는데요, 영화 안시성이 말하지 않는 역사 속 '안시성 전투'를 살펴보겠습니다.2. 전쟁의 서막 - 626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당태종은 동돌궐과 토욕혼, 고창국을 차례대로 공격했습니다. 그런 후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전쟁을 예고라도 하는 것일까요? 『삼국사기』보장왕 3년(644) 10월 평양에 눈이 내렸는데, 그 색이 붉은색이었다라고 전해집니다. 같은 달, 당태종은 이세적을 육군 총사령관에, 장량을 수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며,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3. 안시성을 향해 당군의 진격로 - 유성(영주, 오늘날 요녕성 조양시)에 집결한 당의 군대는 통정진을 통해 요하를 건넜습니다. 고구려의 개모성과 요동성이 함락됐고, 백암성이 당군에 항복했습니다. 승승장구한 당의 군대는 안시성을 향해 진격했습니다.4. 안시성은 어디일까? - 영화 안시성의 무대는 안시성 입니다. 과연 안시성은 어디일까요? 고구려의 성은 세월이 지나면서 이름을 잃어버렸습니다. 현재 안시성으로 유력하게 언급되는 곳은 중국 요녕성 해성시에 위치한 영성자 산성 입니다. 전체 둘레가 약 2.5km정도로 크지 않은 성이지만, 이곳에서 고구려인들은 밀려오는 당의 군대를 막아냈습니다.5. 막아야만 하는 고구려 뚫어야만 하는 당 -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영성자 산성은 요동반도와 압록강 일대를 연결하는 교통로 중 하나인 해성~수암로의 초입에 위치했습니다. 안시성이 함락될 경우, 당군은 오골성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평양 진공을 목표로 했던 당으로서는 반드시 뚫어야만 했던, 반면에 고구려로서는 절대 내어줄 수 없는 곳이 안시성이었습니다.6. 안시성에서의 첫 번째 전투, 주필산 전투 - 6월 20일 당군이 안시성에 도착했습니다. 그 이튿날, 당군과 고구려군이 정면충돌한 주필산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육산이었으나 전투 이후 당의 황제가 행차했다는 의미를 담은 주필산으로 바뀌었습니다.7. 주필산 전투에 대한 오해와 사실 - 영화 안시성에서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전투를 이끌었으나 크게 패한 것으로 재현됐습니다. 그러나 기록에는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15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연수는 당군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크게 패배했으며 결국 36,800명의 고구려 군사와 함께 당에 항복했습니다.8. 안시성 공방전과 토산 축조 -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당군은 곧바로 안시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안시성 함락은 쉽지 않았습니다. 7월 5일 당군은 안시성 가까이로 군영을 옮겼지만 성의 함락은 요원했습니다. 그러자 당군은 안시성 동남쪽에 토산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완공될 무렵 토산이 안시성 족으로 무너졌습니다. 토산을 지키고 있던 부복애가 자리를 비운 참이었습니다. 그 틈에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했고 결국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한 당군은 9월 18일 철군했습니다.9. 안시성 전투를 이끈 안시성주 - 안시성 전투를 끝으로 645년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마무리됐습니다. 이 전투를 주도한 사람은 안시성주 양만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안시성주는 호걸로 비범한 사람인데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라는 김부식의 평가가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까지 안시성주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10. 안시성주 양만춘의 등장 -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으로 알려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입니다. 명나라 때 웅대목이 지은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에 처음 등장하며 명과의 교류 과정에서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전파됐습니다. 이후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다 라는 인식이 대중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양만춘은 역사서에 전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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