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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1. 원시 · 삼한시대의 한일관계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오늘날의 지형을 갖춘 것은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질학에서 말하는 제4 간빙기에 접어들자 기온이 상승하여 수면이 높아져 대한해협과 일본 북단의 소야해협 및 쓰루가해협 등이 생겨 일본은 아시아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해역으로 분리되자 양지역은 각기 다른 문화가 형성되었다. 한국의 즐문(櫛文, 隆起文)토기문화와 일본의 조몬(繩文)토기문화가 그것이다. 이 시기의 양지역간 인간의 교류는 선박과 항해술의 미발달로 교류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해 교류의 실태를 알려주는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1969년 부산의 동삼동패총에서 일본의 큐슈지방에서 제작된 조몬토기가 발견되었고, 수년 후에는 반대로 한반도의 즐문토기가 일본의 코시다카(越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유물의 연대는 약 5천 년 전의 것으로 이미 이 시기에 해상의 길이 열였던 것이다. 즐문토기는 큐슈의 서북지방에서도 잇달아 발견되었고, 일본산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 낚싯바늘이 동삼동패총에서도 나와 어로를 생업으로 하는 해민집단의 교류를 시사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경이 되면 한반도남부로부터 농경문화가 일본열도에 전래된다. 농경문화는 단지 문화의 전파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파종에서부터 추수에 이르기까지의 농경기술과 농지의 개발, 관개시설의 조영 나아가 사계절의 변화를 숙지하고 있는 인간집단의 이주이다. 농경문화의 전래는 재래의 일본열도에 조몬문화에 대신하는 야요이(彌生) 문화를 탄생시켰다. 초기에 북큐슈에 전래된 농경문화는 빠른 속도로 북상하여 1세기만에 혼슈의 북단까지 전파되었다. 농경문화의 전래에 의해 인간은 집단적 거주지를 만들어 농업공동체 사회를 형성하게 되고, 토기에서부터 청동기, 철기 등 문물의 전파와 수용이 활발해져 갔다. 또한 외교와 교역을 통해 양지역의 농업공동체 사회는 점차 발전해 나갔고 점차 지역적 통합이 이루어져 갔다.

오늘날 군 단위의 國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지배계층이 있고 그 밑에 생산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 그리고 전쟁의 패배에 의해 복속민이 된 노예계층 등 신분의 분화된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 농업공동체 사회의 왕은 국의 구성원의 경제와 안보를 책임지는 수장으로서의 책무를 지게 되고 농업공동체의 중요한 의례인 제천의식을 행하게 된다.

이 시기 한반도남부는 삼한시대로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이 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북방에서는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가 출현하였다. 일본열도에서도 북큐슈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각지에 농업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국이 동시적으로 나타났다.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낙랑해중의 왜인 100여국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그것을 말해준다. 이후 2세기중엽이 되면 통합의 기운이 높아져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을 중심으로 한 30여국이 연맹왕국을 형성하게 된다.

기원후 3세기까지의 한일 양지역의 교류의 매체로서 중요한 것은 철자원이었다. 농업공동체 사회에서 철자원은 그 자체가 국력을 말해준다. 철은 철제 농기구와 도구를 만드는 소재로서 농지의 개간과 수리사업에 드는 노동과 공사의 효율성은 생산력을 배증시켰고, 철제무기를 만들어 전쟁의 우위성을 확보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왜인사회에서는 자체 철생산 기술이 없던 시기로 한반도남부로부터 수입철을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었다. 삼한시대의 철산지로는 김해의 구야국이 중심이었다. 『삼국지』「위서」변진조에 의하면, 당시 왜인 뿐만아니라 삼한의 여러지역, 동예, 낙랑에 이르기까지 구야국의 철을 구입해 갔고, 철은 매매의 결제수단인 화폐의 기능도 했다. 3세기 당시 일본열도의 소국들이 광역에 걸친 지역적 통합이 전개된 것도 철의 수입을 둘러싼 투쟁의 결과로 생각된다. 이렇듯 철자원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교류로 인해 한반도남부와 일본열도의 여러 정치집단은 긴밀한 관계를 전개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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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개토왕비문과 한일관계

4세기 이후가 되면 한일 양지역의 지역적 통합은 더욱 활발해져 지역적 맹주국이 등장하게 된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제국이 각각 지역적 기반을 갖고 주변의 소국을 통합하여 고대국가형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일본열도에서는 북큐슈에 대신하여 기내(畿內)의 대화정권이 태동하면서 일본열도의 유력국으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한반도 삼국은 영토적 팽창과정에서 전쟁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상호간의 세력균형은 유지하였다.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은 이러한 세력균형을 일시에 붕괴시켰다. 당시 고구려의 주적은 백제였다. 고구려는 4세기후반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사망하는 등 일시 국가적 위기에 빠졌다. 앞시대에 입은 보복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가하여 수많은 성과 촌락을 함락시키고 왕도에 들어가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복종과 충성을 맹세시켰다. 이에 백제는 397년 아신왕자 전지를 왜국에 파견하여 동맹관계를 맺고 가야제국과도 연합하여 고구려와 고구려의 지원을 받는 신라와 대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400년 경자년에 보기5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국을 격퇴하고 이를 기회로 한반도남부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후 백제는 왜와 합동으로 수군을 이용하여 대방계 방면을 공격했으나 참패로 끝나고 5세기대 고구려 우위의 국제정세가 전개되었다.

그럼 어떤 이유에서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현창하는 비문에 왜의 군사적 업적을 기록해 놓았을까. 그리고 비문의 내용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이 아니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비문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당시 고구려의 지배층을 규제하고 있던 유교정치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조부에 해당하는 소수림왕대부터 유학을 장려하고 대학을 세우는 등 국가의 정치이념으로서 유교를 수용하고 발전시켰다.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이념이란 덕치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구현이다. 비문의 내용은 바로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비문의 중간부분 전체의 3분의 2의 내용이 광개토왕의 업적이고, 8개조에 걸쳐 연도별로 정복지와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왕도정치의 실현이라는 대명제를 표방하면서 무차별적 정복전쟁을 그대로 기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복군주의 이미지를 도덕적 군주로의 승화시키기 위해 전쟁의 불가결성, 즉 전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시키는 명분을 반드시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의 정복전쟁 결과 고구려 우위적 국제질서가 확립되었고, 고구려 중심적 중화사상, 천하관념이 생기게 된다. 비문은 그런 현실적 천하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 있어서 한반도 남부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고 복속해 들어와야 할 지역이다. 그러한 이상을 실현한 고구려는 이들 지역이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왜가 이들 지역을 신민으로 삼았으니 왜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전쟁의 논리,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한반도남부가 왜의 지배하에 놓였다는 가상의 사실을 설정해 놓고 한반도남부에의 군사적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왜란 존재는 고구려에 있어 영토적 정복의 대상도 아니고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전쟁한 이방인일 뿐이다.

요컨대 광개토왕비문에서 왜는 고구려 남하정책의 명분의 대전제로서 고구려 史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전쟁을 통해 인식한 왜를 명분의 소재로서 이용하였던 것이다. 비문의 한 구절로 고대일본의 한반도남부 지배의 증거로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며, 무리하게 사료해석을 달리하여 비문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것은 자국중심의 과잉 역사인식이다. 사료속에 내재된 비문의 논리,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남겨진 모든 사료는 지배층의 자기합리화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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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야와 왜

가야의 전신은 삼한시대의 변한지역이다.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부, 전라남북도 동부일대 대체로 동쪽으로는 낙동강, 서쪽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합천 가야산을 경계로 하는 범위에 속한다. 고대국가로의 통합을 이룩하지 못한 채 동서의 강대국 신라, 백제에 의해 병합되어 버렸지만, 가야제국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뛰어난 선진성을 보여준다. 그런 까닭에 주변제국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가야제국 중에서도 김해의 금관가야는 일찍부터 선진지역이었다 삼한시대의 구야국을 계승한 남부가야의 유력국이었다. 구야국의 전통을 이은 금관국은 낙동강 충적평야의 높은 농업생산력을 비롯하여, 풍부한 어로자원, 철자원을 기반으로 동아시아제국과 활발한 교류를 추진하였다. 3세기 당시 북큐슈의 왜인들도 가야의 철을 얻기 위해 가야지역으로 집중하였다. 철은 화폐로 대용될 정도로 그 자체가 결제수단이었다. 당시의 지배층의 무덤에서 예외 없이 출토되는 것이 바로 철이다.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철제무기의 제작에 소재가 되는 철은 지배자가 획득해야 할 중요한 물자였다. 철은 그 자체가 권력의 상징이고 왕권의 유지와 지배체제의 구축에 없어서는 안될 자원이기 때문이다.

4세기대 가야제국과 왜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기록에는 없다. 4세기대의 일본열도의 상황은 중국문헌에도 소멸되어 이른바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부른다. 야마타이국이 266년 중국의 서진에 조공한 이후 기록으로부터 소멸한다. 야마타이국 이후의 큐슈의 정치적 동향에 대해선 잘 알 수 없지만, 연맹왕국으로서의 야마타이국의 권력은 쇠퇴했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은 지역적 정치체의 존재는 계속 유지되었다고 보인다. 왜의 제세력도 대중국통교가 단절된 상황에서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남부 지역과의 교류는 앞 시대보다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관국, 탁순국, 안라국 등 남부가야 제국들은 3세기의 전통을 이어 북큐슈 등의 지역정권들과의 교류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발굴조사에서 4세기전반대로 추정되는 고분으로부터 파형동기, 벽옥제 화살 등 왜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왜의 수장층과 금관국의 지배자 간의 교류의 상징물로서 금관국이 철을 공급하는 대신에 왜의 수장은 왜국에서 생산된 의기(儀器)나 쌀 등을 바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교류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시 가야제국의 중개를 통한 백제와 왜국의 통교, 왜병의 출병, 가야제국의 결집으로 이어지는 백제-가야-왜의 정치 · 군사적 협력체제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4세기 말 5세기 초의 고구려 광개토왕의 한반도 남부지역에의 대규모의 군사적 감행은 동아시아제국을 동란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이후 상당기간 동안 한반도남부에의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주변의 관련국들은 자국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민감하게 대응해 나갔다. 광개토왕비문의 영락10년(400)조에 의하면, 왜병이 신라국경에 출몰하자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보기5만의 병력을 신라에 보내어,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의 왕성인 신라성에 포진해 있던 왜병을 공격하고 임나가라의 종발성 까지 추격하여 그 성을 항복시켰다. 이때 안라국에서 병력(安羅人戍兵)을 파견하여 왜병과 함께 고구려 · 신라의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가야제국이 왜병과 함께 군사적 공동보조를 취했다는 사실은 가야제국과 왜국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즉 남부가야의 대표적인 2국, 안라국과 금관국(任那加羅)의 대왜관계가 이 시기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백제의 대왜군사 요청을 위해 아신왕자 전지를 파견하게 되었던 것도 이들 가야제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가야제국은 4세기후반 근초고왕때 맺은 화친관계를 바탕으로 가야의 도움을 받아 왜국에 청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가야제국과 왜의 정치집단간의 오랜 교류와 친연관계의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다.

고구려의 남정이 초래한 파문은 대단히 컸다. 고구려의 남정은 신라를 비롯하여 금관국, 안라국등 가야지역의 상당 지역에 세력이 뻗쳤다고 생각되며, 이들 지역에 대한 군사적 주둔, 재지세력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남정이 가져온 파장은 일본열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틀림없다. 전란에 의해 금관국을 비롯하여 여러지역의 가야인들은 왜지로 이주, 망명했을 것이다. 근년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산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의 계보가 가야의 도질토기에 있으며 북큐슈에서 생산이 개시, 이후 긴키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역사적 배경으로서 광개토왕의 남하에 동반하여 난을 피해서 가야로 부터 북구주로 이주해 온 기술자에 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가야인들의 왜지로의 이주는 신기술, 신지식의 전파이며 일본고대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여진다. 이들 가야인 중에는 기내의 왜왕권에 포섭되어 왜조정에 봉사하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안나(安那), 미마나공(三間名公), 기문씨(己汶氏), 달사씨(達沙氏), 다다라공(多多良公) 등 가야의 국명, 지역명을 딴 씨족들이 사료상에 등장하고 있어 가야로부터의 이주민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가야인들의 왜지로의 이주와 왜왕권에의 참여는 이후 가야제국과 왜국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왜왕권의 가야문화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고 가야지역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품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가야멸망 이후에도 왜왕들의 지상의 과제로서 가야의 부흥을 외쳐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6세기에 들어가면 가야제국은 신라, 백제에 의해 점차 소멸되어 간다. 6세기초 섬진강중하류역에 존재했던 기문국, 대사국은 백제의 남하에 의해 그 세력권하에 들어간다. 이때 기내의 왜왕권은 백제를 도와 병력을 보낸다. 이 사건은 왜가 백제를 도와 가야를 공격한 사건인데, 이때 북부가야의 대수장이었던 대가야는 왜와 군사적 대치상태를 맞이한다. 가야제국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왜가 무슨 이유로 가야제국에 적대행위를 했을까. 이것은 일본열도의 정치세력과 가야제국간의 다원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의 주체가 한 세력에 의해 독점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간의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섬진강 방면의 가야제국은 주도 북큐슈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세력과 친연관계를 유지했고, 낙동강하류역의 가야제국은 기내의 대화정권과 교류했던 결과로 보인다.

532년에는 금관국이 신라에 의해 병합되고 곧이어 주변의 탁순국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550년대가 되면 남부가야의 유력국 안라국이 멸망하고 562년에는 가야의 마지막 왕국 대가야가 멸망되어 버린다. 경상도 일원의 가야제국이 모두 신라에 의해 병합된 것이다. 이후 왜왕권은 가야의 부흥을 외치지만 역사의 대세는 신라로 넘어갔다. 왜국에 있어 가야란 철자원 등의 선진문물의 수용처이고 이러한 가운데 친연관계로 발전해 갔다. 가야와 왜국은 철자원을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철자원 자체가 왜국의 존립기반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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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나일본부설과 한일관계

고대한일관계사에서 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가 임나일본부설이다. 이른바 임나일본부란 대화정권이 가야지역에 일본부라고 하는 지배기구를 설치하고 통치했다고 하는 것이다. 대화정권이 가야7국을 평정하는 369년에서 가야의 최후의 왕국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약 200여년을 그 지배의 범위로 보고 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의 고문헌인 『일본서기』에 근거하고 있다. 『일본서기』 신공기49년(369)조에 의하면 가야의 주요 7개국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다. 그 후 가야를 어떻게 통치했는지에 대한 지배의 실태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그 후 흠명기23년(562)조에 「신라가 任那官家를 멸망시켰다」라고 하고, 분주에 「任那는 멸망했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任那라 하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 · 안라국 · 사이기국 · 졸마국 · 고차국 · 자타국 · 산반하국 · 걸찬국 · 임예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임나는 가야제국 전체를 총칭하기도 하고 개별적인 국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제국은 임나관가의 관할하에 있었고, 임나관가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웅략기7년조에는 임나국사(任那國司)라는 말이 보이고 임나국사는 일본 현지에서 파견된 것으로 되어있다. 官家라고 하는 말은 원래 ‘미야케(屯倉)’라고 하여 일본고대의 대화정권의 지배기구의 하나로 왕실직할령적 성격을 지닌다. 둔창이 국내적 용어라면, 관가는 해외적 의미가 강하다. 즉 임나관가란 해외에 설치된 일본고대 왕실의 직할령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용어인 이른바 임나일본부란 바로 임나관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서기』에 그려진 임나일본부상이다.

일제통치하의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5개년계획을 책정해서 한반도 전역에 대한 고적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다. 이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계획으로 추정된다. 조사계획이 종료한 1921년 참여자의 1인인 교토대학의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선입견을 갖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그의 논문에서 솔직히 토로한 적이 있다.

80년대 이후의 가야문화권의 발굴조사에 의해 가야문화의 독자성, 선진성을 알려주는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편성하여 임나일본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학계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한 견해는 가야측의 입장을 중시하는 쪽으로 점차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주요 학설을 살펴보면, 왜는 가야의 별칭이라는 결론에 기초해서 임나일본부는 가야의 재지호족에 의해 구성된 합의체라는 설, 왜왕권이 파견한 관인이라는 설, 가야제국이 대왜외교를 위해 설치한 외교기관설, 가야제국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가야제국의 왕과 일본부 관인이 합의체를 구성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국내에서도 백제에 의한 지배기관설, 가야제국의 독립보존을 위해 활동한 가야재지의 인간집단설 등이 제기되었다.

이들 제설의 공약수로서 모아지는 것은 대화정권에 의한 가야지배설은 부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임나일본부 연구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며, 가야와 왜의 관계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시기문제도 6세기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적으로는 안라국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데에는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기능면과 일본부 구성분자의 출자문제가 엇갈리고 있지만, 가야제국의 이익을 보존하는 쪽으로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대세이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유일 사료인 『일본서기』에는 사료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웅략기의 1예를 제외하면 540년대의 흠명기에 집중하고 있다. 가야제국이 신라, 백제에 의해 소멸되어 가는 국가적 위기에 빠져있던 시기적 상황을 고려하면, 가야제국이 당면한 긴급과제는 이러한 위기로부터의 탈출이다.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의 구명에 있어 전제 조건이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는 독자의 실체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임나부흥회의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임나부흥회의란 532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한 금관국 등 그 주변제국의 부흥에 관한 회의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천황이 임나의 부흥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지만, 회의의 주역은 안라국과 백제로 되어 있고, 특히 백제 성왕의 의도가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 부흥회의의 참여자는 왜계라고 생각되는 인물도 보이지만, 가야제국의 지배층과 신라, 백제의 관인이 주도하는 국제회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일본천황의 지시에 반하는 행동으로 빈번히 나오고 있어 고대일본의 가야지배설을 반증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주도의 임나부흥회의가 나타나는 것은 흠명기의 대외관계 사료의 대부분이 「百濟本記」라고 하는 백제계 사료로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6세기대 가야제국을 사이에 두고 경쟁관계에 있었던 백제로서는 이 시기의 가야관련 사료를 백제중심에 놓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보인다. 가야지역으로 침투하려는 백제의 노력은 자연 가야를 압박하게 되고 그 와중에서 임나부흥회의를 백제위주로 이끌어 가려는 일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 자체가 일본부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임나부흥회의에 나타난 이른바 일본부 관인으로 나오는 인물들의 성향은 친가야적이고, 반백제, 비일본, 비신라적 입장을 고수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것은 특정 세력에 의한 지배기관설을 부정하는 증거이며 가야제국이 주변제국으로부터 자립해 나가려는 경향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중심이 있었던 것이 안라국이다. 안라국은 광개토왕비문에도 나오듯이 4세기말 5세기경에는 김해의 세력과 쌍벽을 이루는 가야제국의 유력한 국으로 성장했으며 고구려, 신라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보일 정도로 가야제국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지녔다고 보인다. 금관국이 멸망하는 530년대 이후가 되면 남부가야제국내에서는 맹주적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쇠퇴기의 가야제국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나라였다. 임나일본부 문제가 안라국을 무대로 해서 전개된 것도 가야제국의 자립을 노리는 주체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임나일본부란 가야제국이 국가적 위기에 처한 540년대 안라국이 중심이 되어 가야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인간집단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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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제와 왜

한반도 삼국 중에서 왜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국은 백제였다. 백제와 왜국은 국교의 성립에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마치 형제국과 같이 친연관계를 맺어 왔다. 양국의 국교의 성립은 일반적으로 『일본서기』신공기46년조에서 52년조에 걸친 탁순국의 중개로 이루어졌다는 내용과 백제가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 명문의 연호를 동진의 태화4년(369)으로 본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칠지도는 연호의 문제를 포함하여 제작시기가 1세기 이상 내려갈 가능성이 높고, 신공기 기사의 신뢰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어 4세기후반의 근초고왕대 국교성립설은 논란이 되고 있다.

백제의 왜국에 대한 정보는 근초고왕대에 남부가야제국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양국의 관계가 긴밀하게 되었던 것은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이었다.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듯이 고구려는 396년 58개의 성과 , 7백여 개의 촌락을 함락시키고 왕도에 진격하여 아신왕을 항복시켰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백제는 397년 태자 전지를 왜국에 보낸다. 광개토왕비문에도 "백제가 맹서를 어기고 왜와 통했다" 라 하여 양국은 군사동맹을 맺게 된다. 수십 년에 걸친 고구려와의 군사적 항쟁을 벌이고 있는 백제로서는 장기적인 군사적 파트너로서 왜국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후 양국의 군사협력체제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수많은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5세기 후반 백제 개로왕은 왕제 곤지(昆支)를 왜국에 파견한다. 곤지는 461년에 왜국에 가서 16년간이라는 장기체재에 들어간다. 개로왕이 곤지를 파견한 이유는 왜왕권 내에서의 지속적인 친백제노선을 유지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피살되고 왕도가 함락되어 웅진으로 남천하는 등 대혼란에 빠진다. 게다가 내부적 정쟁으로 인해 문주왕과 삼근왕이 죽음을 당하는 사태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서 왜국에서 출생한 곤지의 아들 동성왕이 귀국하여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친왜적 성향의 동성왕의 즉위로 백제와 왜국간의 협력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6세기대의 백제와 왜국의 선진문물과 군사적 지원이라는 상호 교류는 이러한 토대위에서 마련되었다.

동성왕에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전대에 이어 친왜 노선을 계승해 나간다. 무령왕대의 백제는 적극적인 남하정책으로 섬진강 방면의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었고, 왜왕권은 백제의 정책에 동조해서 병력을 파견한다. 이에 백제는 오경박사 등 고급 인적자원을 파견한다. 무령왕 다음의 성왕대에는 한반도제국이 동맹과 연합을 되풀이 하며 치열한 영토전쟁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성왕은 이러한 전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국에 남조의 선진지식과 기술을 지닌 제박사를 보낸다. 특히 백제성왕에 의한 백제불교의 일본전래는 왜국에 선사한 최대의 선물이었다.

백제와 왜국간의 교류의 특징을 보면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간 인적 대상은 수공업자를 비롯한 기술집단, 유교 경전에 밝은 지식인, 불법을 전수하는 승려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금래한인(今來漢人), 금래재기(今來才伎)라고 불리우는 기술자집단의 도래는 7세기이전 왜국의 지배조직인 부민제(部民制)의 기원을 이룬다. 금래한인으로 편성시켰다는 도부(陶部), 안부(鞍部), 화부(畵部), 급부(錦部), 역어(譯語) 등은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세습적 전문직업집단이다. 『주서』백제전에 보이는 백제 내관제인 곡부(穀部), 육부(肉部), 마부(馬部), 도부(刀部), 약부(藥部) 등의 제도가 원형이다. 일본고대국가형성기에 생산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부민제의 체계적인 정착과 발전을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선진기술집단의 수용이 필요하였다. 이를 항상적으로 제공했던 것은 백제였다.

백제에서 제공했던 것은 생산문화 뿐만이 아니었다. 醫(의약물), 易(복서), 曆(역본)에 밝은 제박사의 파견도 주목된다. 특히 제박사, 공인들이 순번제로 교대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정기적으로 항상적인 파견을 통하여 백제의 선진문화를 왜국에 전수한 전문인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불교전법사로서의 승려와 각종 불상, 불구 그리고 이를 제작하는 공인들의 파견을 통해 왜국의 정치, 문화는 발전해 나간다.

640년대에 들어가면 한반도 삼국의 군사적 대립은 격화되고 동아시아제국을 상대로 한 군사외교도 치열해진다. 이 시기 백제의 최대의 적은 신라였다. 백제는 고구려영유로 들어간 한수유역을 신라와 연합하에 탈취에 성공했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한수유역을 빼앗기고 성왕이 전사하는 등 대신라 적개감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641년 의자왕대 백제는 신라의 서부를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고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대립은 양국의 대왜외교를 강화시켰다. 신라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 김춘추를 왜국에 보내 왜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백제도 장기외교의 일환으로 이미 수년전에 풍왕자 등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13만의 당군과 5만의 신라군이 합세한 군사력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만다.

660년 9월 백제사에 의해 왜조정에 전해진 제1보는 신라가 당인(唐人)을 끌여들여 백제를 전복하여 군신을 모두 포로로 하여 살아남은 자가 없다고 하고 10월에는 당 포로 100여인을 바치고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왜왕권은 동년 12월 백제구원을 위한 계획에 착수하여 축자의 나대진을 본영으로 하는 출병준비를 완료한다. 661년 8월에 왜국에 체재중이던 백제 의자왕자 풍왕자가 부흥군의 수장으로 귀국하자 5천명의 호위병을 보내고, 이듬해 정월에는 10만개의 화살을 포함한 많은 전쟁물자를 보내고, 5월에는 수군170척을 그리고 663년 3월에는 27000명의 대규모의 병력을 증파한다.

백제국의 성립이후 멸망에 이르기 까지 양국은 지배층간의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이것은 일시적이고 단순한 동맹관계가 아니라 장기간의 역사적 흐름속에서 형성된 친연관계였다. 고대 동아시아제국 중에서 국교의 성립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백제와 왜국만큼 변함없는 친연성을 유지한 나라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것은 고대국가형성과정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조건, 상황이 맞았기 때문이며 그런 가운데 교류가 활발해지고 지배층간의 신뢰와 우호관계가 깊어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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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구려와 왜

왜왕권이 동아시아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이라는 사건에 연동하면서부터였다. 백제의 지원요청에 응하여 최초의 공적 파병을 단행했던 왜왕권은 고구려의 정비된 기마병대에 참담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 시기에 형성된 고대일본의 고구려 인식은 강성의 이미지로 고착되면서 그 후 일본의 고구려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반도남부의 여러지역과 교류하던 일본열도의 제세력은 고구려 남정이라는 대대적인 역풍을 맞아 왕권유지에 필요한 철자원 등의 선진문물의 수입에 커다란 제약을 받았다. 군사력으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어려웠던 왜왕권은 중국 남조의 송과의 외교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倭王武가 송황제에게 바치는 상표문에는 고구려에 대한 증오의 念이 절절히 배어나고 있다. 광개토왕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왜왕들이 경험한 과거의 기억들이 중첩되면서 송황제의 감성에 호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强敵’ 고구려를 한반도남부로부터 철퇴시키려 했던 왜왕들의 대송외교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대송외교의 실패 이후 왜왕권의 대중통교는 단절된채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 선진문물을 수입하게 된다.

6세기 이후가 되면 한반도에서의 신라가 급성장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접수하고 이어 고구려령인 한반도 동북방지역까지 침투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단 한차례의 공적 통교가 없었던 왜에 동해를 횡단하는 해상루트를 통하여 사절을 파견하게 된다. 신라세력의 성장에 따른 왜와의 군사협력체제의 구축을 위한 노력이었다. 고구려사를 맞이하는 왜왕권의 인식은 경계와 환영이 교차하는 2중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고구려사를 위한 영빈기관을 새로이 조영하고 장식선을 건조하여 맞이하였다. 고구려사에 대한 왜왕권의 태도는 7세기 초 隋使 일행에 비견될 만큼 외교적 의례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에 대한 강한 경외감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과거 고구려의 군사적 강대함에 밀려 대송외교를 통해 대응하려 했고, 때론 백제를 지원하여 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고구려가 왜국를 찾았다고 하는 그 자체가 왜왕권에게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왜왕 흠명의 조서에서도 나타나듯이 우호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왜왕권은 用明朝(586~587) 때에 왜왕권에서 최초로 阿倍比等古라는 사절을 고구려에 파견하였다. 고구려 사절 파견에 대한 답례였다. 영양왕6년(595)에 고구려는 승 혜자를 파견한다. 혜자는 추고조에 「섭정에 임하고 만기를 위임하였다」는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어 그의 정치, 외교상의 고문역할을 하였다. 혜자는 불교의 교리 뿐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었다. 혜자가 입국한 이듬해에 아스카사가 완성된다. 이 절은 왜국 최초의 가람형식을 갖춘 官寺的 성격의 사찰이었다. 혜자는 「불교를 포교하고 아울러 불법의 기둥이 되었다」라고 하듯이 초창기의 왜국 불교계를 지도하며 육성,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7세기에 들어가면 추고9년(601) 3월에 왜왕권은 대반련설을 고구려에 파견한다. 그는 이듬해 6월 백제를 경유하여 귀국하는데, 이것은 왜국의 대고구려 외교의 내용을 백제측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즉 570년에 고구려가 의도한 고구려-백제-왜를 잇는 군사협력체제가 왜국의 협력에 의해 성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605년에는 고구려 영양왕이 왜왕권의 불상조영에 황금300냥을 보낸다. 610년에도 고구려가 승 담징과 법정을 보내어, 채색법, 종이 · 묵 · 맷돌 제조법을 전수하는 등 고구려로부터 문화, 예술적 재능을 지닌 승려들이 파견되어 왔다. 623년에는 고구려 영류왕이 혜관을 보냈는데, 그는 왜국 불교계를 총람하는 僧正의 지위에 임명되었다. 이렇듯 7세기전반은 불교문화를 비롯한 고구려의 인적, 물적 자원등 다대한 문화정보가 왜국으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긴밀한 교류 속에서 왜왕권은 고구려사에 대해 ‘神子’가 보낸 사절이라는 경외감을 표시한다. 이는 다른 한반도제국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차별적 표현으로 고구려에 대한 강한 유대감, 경애와 존중의 발로였다.

이후 양국은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사절을 교환하여 긴박한 동아시아정세에 정보를 주고받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왜국은 나당연합군의 협공으로 쇠퇴해 가는 고구려에 협력하기는 어려웠다. 백제멸망 이후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왜국 자체의 위기의식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6세기말 이후 1세기간 유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의 많은 문화적 혜택을 받은 왜국은 일본열도로 들어오는 고구려의 유민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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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라와 왜

신라의 대왜관계는 양국의 지리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고대국가형성기 초기부터 접촉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5세기 이전까지 50여회에 걸친 왜와의 접촉기사가 나온다. 왜인, 왜병의 침입기사가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는 외교적 성격을 띤 사절의 왕래도 다수 보이고 있다. 3세기중엽 昔于老 전승은 당시 울진방면의 우유국과 북큐슈의 왜와의 접촉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왜사절의 접대를 맡은 우로가 실언을 바는 바람에 왜인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우로의 부인이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설화성이 짙은 내용이지만, 고대국가형성 초기의 한일 지역수장간의 교류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4세기말이 되면 광개토왕의 남정으로 백제와 왜가 군사동맹을 맺게 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신라는 402년 내물왕자 미사흔을 왜국에 파견한다. 이것은 백제의 대왜 군사동맹을 약화시키고 친신라적 노선으로 선회하도록 하는 신라의 외교전략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신라가 파견한 미사흔은 왜국에 억류되고 만다. 백제와 왜국의 군사동맹을 와해시키기에는 불가능하였고 그만큼 양국관계의 결합력은 공고했다고 보인다.

6세기가 되면 백제와 기내의 왜왕권간의 활발한 교류의 와중에서 신라와 북큐슈의 수장 이와이(磐井) 간의 정치적 연합이 시도되었다. 신라와 북큐슈의 수장간의 정치적 결합은 기내의 대화정권과 백제의 군사동맹에 대한 대응책으로 보인다. 신라와 백제는 북의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동보조를 취하면서도 가야제국을 둘러싸고는 대립적, 경쟁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열도내의 제세력과 협력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6세기대는 신라가 가야방면에 대한 군사적 진출이 본격화되어 왜왕권과 교류가 깊었던 금관국 등을 병합해 버린다. 이로 인한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7세기 초까지는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양국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610년의 신라의 대왜견사이다. 이해에 파견되어 온 신라사에 대한 왜왕권의 태도가 주목된다. 신라사절을 맞이하는 왜국의 태도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외교의식을 갖춘다. 이러한 외교노선의 변화는 직접적으로는 왜왕권의 대수외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수통교가 원활하기 위해선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성이 중요하였다. 견수사의 주요 통과지역을 신라가 장악하고 있는 한 항해의 안전성은 보장하기 어려웠고 신라의 위협은 현실적 가능성을 띠고 있었다. 추고18년(610)의 신라사에 대한 외교의례는 바로 대수외교를 의식한 대외관계의 커다란 수정이었다. 종전의 백제, 고구려 중심의 외교에서 신라와 수를 포함한 다면외교로 확대시킨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선진문물을 제공하면서 왜왕권과의 관계를 긴밀히 해나간다. 일본 광륭사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1호인 목조미륵보살상은 이때 신라에 의해 전해진 것이다. 수당이 교체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신라는 송사외교를 통해 대왜외교를 강화해 나간다. 송사외교란 중국에 파견된 왜의 사절을 신라선으로 왜국에 귀국시키는 일이다. 신라는 이해에 외교사무를 관장하는 영객부를 영객전으로 개칭하였다. 영객부의 본명은 倭府로서 원래 대왜관계사무를 주관하던 부서가 확대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외교기구의 확대는 대왜외교를 포함함 신라의 국제외교가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사외교의 성립에 의해 왜국은 왜-신라-당을 잇는 육해상의 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고 동시에 신라와 당의 선진문물의 수입도 용이하게 되었다. 7세기전기의 신라와 왜국은 수당의 출현과 한반도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상대국이 추구하는 매체를 통해서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해서 자국에 유리한 국제관계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645년 왜왕권은 조정의 권력을 전횡한 소가씨를 타도하고 대화개신을 실현하여 왕족중심의 개신정권을 성립시켰다. 이듬해 9월 개신정권의 최초의 외국사절을 신라에 파견했다. 이는 개신정권의 정통성을 알리고 신라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전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또 다른 목적은 632년 이래 단절되어 있던 왜왕권의 대당통교를 신라의 중개에 의해 타개하려는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는 긴박한 한반도 정세하에서 새로 성립한 왜국의 개신정권에 김춘추를 파견했다. 당시 김춘추는 왕위찬탈을 노린 상대등 비담의 난을 수습하고 실질적인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그의 왜국행은 왜왕권의 친신라노선을 확약받기 위한 외교가 목적이었다. 『일본서기』에는 김춘추에 대해 이례적으로 「春秋의 용모가 수려하고 화술에 능하다」 라고 특기할 정도로 왜왕권의 지배층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대왜외교를 일단락지은 김춘추는 왜국의 대당 상표문을 갖고 648년 당에 들어가 왜국과 당의 통교를 중개했다. 이어 649년에는 김다수가 왜국에 파견되어 김춘추가 중개역할을 한 결과를 전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651년에 당의 복장을 한 신라사가 왜국에 왔다. 신라사가 당복을 입고 왜국에 온 것은 일종의 정치 · 외교적인 공세로서 당의 권위를 업은 신라의 왜왕권에 대한 위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당 라인의 강한 결합을 과시하는 것이고 왜왕권으로 하여금 문화적 교류관계를 넘어 정치적 · 군사적 연합을 강요하는 메시지였다.

654년 왜왕권은 외교노선에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당고종은 왜왕에게 신라가 고구려 · 백제의 공격을 받을 때, 출병하여 구원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에 왜왕권은 신라-당라인에의 일방적 편입을 거부한 채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백제,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655년 당의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은 왜왕권에도 위기의식을 초래하였다. 이에 왜조정에서는 656년 왕도 아스카를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의 군사시설물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분명 당 · 신라가 왜국을 적대하고 있다는 왜왕권의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당에서는 당에 접근하면서 고구려 · 백제와도 통하는 왜왕권의 2중외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신라 역시 당의 거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당의 외교방침에 동조하여 657년 왜왕권의 견당사를 신라사신에 딸려서 당에 보내려고 했으나 거절하였다.

이어 2년 뒤 왜국에서 파견한 견당사일행이 당에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이길련박덕서에 의하면 당에서는 659년에 파견된 견당사에 대해 「국가는 내년에 반드시 해동에 쳐들어 갈 것이다. 너의 왜인도 동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칙지를 내려 이들을 유폐시켜 버린다. 당의 이러한 조치는 왜가 고구려 · 백제라인에 가담하고 있고, 반드시 군사적 공조를 취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당의 군사적 기밀의 누설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생각된다.

7세기 이후 신라가 활발한 대왜외교를 추진하면서 선진문물을 제공했던 것은 대립관계에 있었던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라의 이러한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고, 당의 군사협력을 확약받은 뒤 왜국도 여기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면서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마저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했다. 이것은 국제관계를 효율적으로 이용한 신라 외교술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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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통일신라와 일본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660년과 668년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신라의 의도와는 달리 당은 웅진도독부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점령지에 대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이에 신라는 대당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후방의 안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668년 9월에 일본에 사신 김동엄을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일본도 백강 전투의 패전으로 국내적 위기가 심화되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산성을 축조하고, 연안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망을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으로서도 국내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해 신라와의 국교수복은 필요하였다. 이렇게 하여 재개된 양국관계는 공적교류가 끝나는 779년까지 신라에서 46회, 일본에서 27회의 사절을 상대국에 파견하였다.

7세기후반 신라의 대당관계는 당세력의 한반도로부터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등 적대적 관계였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일본 역시 7세기말까지 당과의 교류를 단절한채 신라와의 교류에만 주력하였다. 양국은 당을 의식한 공존의 관계로 비교적 평화적인 교류를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양국 교류의 특징은 신라문화의 일본전파가 두드러졌다. 일본에 있어 신라는 해외의 선진문물의 유일한 통로였다. 일본의 율령국가의 수립을 위해 신라의 법령, 불교, 학문, 사상 등 다양한 방면에서 신라배우기에 주력하였다. 신라사의 일본 체재기간에 비해 일본사절의 신라체재기간은 두배가 훨씬 넘는다. 이러한 사실은 공적 임무가 끝난 이후에 신라의 각종 제도, 사상을 접하고 생산 공방시설을 견학하는 등 다양한 문화체험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율령국가의 수립은 이때의 신라와의 교류에 기초를 이루고 있다.

8세기에 들어가면 일본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천황제 율령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율령 법전에 신라를 일본의 번국, 조공국으로 간주하는 조문을 삽입시켰다. 신라보다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쟁심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현실의 외교의 장에서도 이를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신라사절에 대해 국서의 지참을 요구한다던가, 신분이 높은 사절을 파견하라든가 하는 것이다. 이에 신라의 반응은 일본의 요구를 거의 무시하고 있으며, 신라에 온 일본사절에 대해 무례함을 지적하면서 접견을 불허하는 등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양국간에는 종종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풍부한 생산력과 우수한 수공업 기술을 바탕으로 대일교역에 주력하였다. 신라의 생산공방에서 만든 수많은 물품과 당을 통해서 들어온 외국의 물자가 신라를 통하여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752년에 일본에 온 김태렴을 수석으로 한 700여명의 사절단은 바로 외교적 임무뿐만 아니라 교역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은 국가기구의 확충과 사찰의 조영 등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수많은 물자가 필요하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높은 문화의식을 반영하듯 해외산 물품에 대한 욕구도 강해 신라로부터 들어오는 다양한 사치성 물건을 구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의 관인, 귀족들이 신라물을 구입하기 물품의 품목과 가격을 기록하여 관청에 올린 명세서인 「바이시라기모츠케(買新羅物解)」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식기류 등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융단, 불교관련 제품, 약물, 향료, 유리제품 등 많은 종류의 물건이 나온다. 현재 동대사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의 유물은 당시의 신라와 일본의 교류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779년 이후가 되면 양국의 공적 교류는 종말을 맞이한다. 신라 하대에 들어가면 지배계층 내부의 분열항쟁이 격화되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신장되어 중앙의 통제가 어려워졌다. 9세기에 들어가면 국내의 혼란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신라인이 증가하고, 장보고와 같은 민간레벨의 해상무역을 종사하는 자가 늘어났다. 이들은 당과의 활발한 교역을 행하면서 일본에도 도항해서 왕경의 귀족층과 큐슈의 재지호족들간의 사적무역을 행하는 등 민간레벨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 일본조정은 신라인과 재지세력의 결합을 두려워하여 이를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후 일본은 점차 주변제국에 대한 배외적 폐쇄적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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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발해와 일본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대조영이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통합해서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진국이라고 했다가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에 봉해져 후에 발해로 칭하게 되었다. 발해의 대일교섭은 727년에 첫 사절을 보낸 이후 멸망에 이르는 10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발해의 2대 무왕때인 726년에 인접한 흑수말갈부가 발해령을 통과해서 당에 사자를 파견한 일이 있고, 당은 흑수말갈부에 흑수주를 설치하여 예속화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발해의 대당관계는 악화되었다. 발해의 대일견사는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당과 손잡고 있는 신라가 배후의 위협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대신라 견제를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발해와 일본의 공식 사절을 보면 발해에서 일본에 34차례 사절을 파견하였고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사절은 13차례나 되었다. 동해의 풍랑을 가로지르며 조난과 표류가 거듭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항해여건과 22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발해의 존속기간을 감안해 본다면 47회라는 교류횟수는 양국간의 관계가 긴밀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727년 고인의(高仁義)의 파견으로부터 763년까지는 발해와의 교류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함으로써 일본을 자신의 배후세력으로 공고히 하였다. 발해는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분명히 하는가 하면 안사의 난이라는 대륙의 위기적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위기적 정세를 이용하여 신라침공계획을 도모하기도 했으나 발해는 이러한 일본의 관심을 십분 활용하여 발해사의 초빙과 입국의 전 과정에 걸친 편의를 제공받고 양국간의 교류 기반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는 8세기 후반에 이르면 발해의 대외적 자신감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외교를 시도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해 일본과 몇 가지 외교적 갈등이 야기되기도 했다. 771년 일만복(壹萬福)의 파견시 국서에 발해가 천손임을 강조하고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삼촌과 조카관계로 표현하여 한 차례 갈등을 겪었으며, 발해사의 도착지를 둘러싸고 일본은 츠쿠시(筑紫)의 길을 이용하여 다자이후(大宰府)로의 입국을 강권했으나 발해는 계속 북로를 이용했다. 또한 방문기한을 둘러싼 공방도 있었는데 일본은 12년 1회 방문을 제안하였으나 발해는 이를 무시하고 연이은 방문을 요구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크고 작은 갈등은 결국 모두 발해의 요구대로 마무리된다. 츠쿠시(筑紫)의 길을 요구하던 일본은 결국 북로 도착지인 노토(能登)반도에 발해객원을 설치하였는가 하면 발해사의 방문기한에도 제한을 두지 않게 되었다. 8세기 후반의 이러한 크고 작은 갈등이 마무리되자 9세기 이후에는 발해의 계속된 사신파견이 이어진다.

이처럼 양국의 교류는 결국 발해의 요구대로 전개되고 나갔다. 일본으로서는 발해와 관계를 악화시켜 교류를 통해 얻는 혜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며 발해는 이를 적절히 조정하였던 것이다. 우선 일본은 발해를 통해 대륙문물 수입이나 견당 인사들의 연락을 원활하게 이룰 수 있었다. 특히 894년 공식적으로 견당사가 폐지되면서 대륙과의 연계는 발해에 상당부분을 의존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발해사신이 가져오는 진귀한 산물에 대한 욕구충족이었다. 발해의 중요한 수출품은 모피였고 이외에도 각종 해산물, 인삼, 꿀 등 다양한 산물이 교류되었다. 발해사신이 가져 온 물건을 왕실에서도 직접 구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직접 물품을 거래하였다. 때때로 구매를 둘러싼 욕구가 너무나 지나쳐 일본조정은 제한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하기도 하였으나 발해사신의 방문과 이에 따른 교류를 제한할 수는 없었다.

양국의 교류는 정치적 · 경제적 이익과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교류의 장을 열어 나갔다. 특히 9세기 이후 전개된 양국 문인들간의 한시 교류는 문화교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발해측에서는 양태사(楊泰師), 왕효렴(王孝廉), 배정(裵頲)과 같은 당대 최대의 문사들이 사절단에 포함되었고 이들을 맞이하는 일본측에서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오에아 사츠네(大江朝綱), 시마다 타다오미(嶋田忠臣)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연회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발해사신의 방문시 개최된 연회자리에서 선보였던 발해음악은 후에 일본 궁정의 우방악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발해는 적극적이고 용의주도한 전략으로 일본과의 교류를 자국에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어 나가면서 정치, 경제,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교류의 장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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