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봉우권태훈옹 ㅡ1984년 소설 `단`의 실제주인공이며 일명 우학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던분입니다..
어릴때부터 단전호흡을 배웠으며 천문 지리 의학에 도통하셨음. (1900~1994년 작고)
ㅡㅡ역사에 가리워진 우리 고대 문화ㅡㅡ
무슨 일이든지 표현된 일도 있고 그 반대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표현된 일만으로도 알 수 없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 역사로 보자. 상고사(上古史)는 잘 알 수 없으니 그만두고 중고(中古)역사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병사 백만을 청천강에서 대파(大破)하였다.
비록 알 수 없는 일이나, 수나라 군사가 청천강을 건너다가 패망한 것은 사실이요, 이런 야담이 있으니 사실여부는 알 수 없으나 야담으로 전해두고 을지문덕이 무슨 병력으로 수나라의 대군을 전멸시켰는가 하는 데는 연구할 자료가 되는 것이다.
또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와 대전(對戰:맞서 싸움)해서 개인적으로 승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반드시 병사 대 병사의 전술이었는데 만약 일시적으로 수나라 병사가 실수해서 패했다면
우리가 억측하는 것이라도 재기습래(再起襲來:다시 일어나 습격해옴)가 문제가 아닌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치명상(致命傷)적인 손해를 주어서 육군으로 감히 다시는 돌아보지 못하게 했으니,
이 무슨 병법에 해당하는가. 병사(兵事:군사)연구하는 인사들은 충분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훈련하던 방식은 무엇인가, 무기는 어떤 것인가. 을지문덕이 무슨 공부를 하던 사람인가. 각 방면으로 조사해야 하는 것이요,
역사를 볼 적에 주마간산(走馬看山:말달리며 산을 봄)격으로 보아서는 아무 효과도 발생하기 극히 곤란한 것이다.
그다음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병(唐兵:당나라 군사)을 파(破:깨뜨림)할 때에 보면
이세민(李世民)이 중국을 평정하고 그 여위(餘威:남은 위력)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다.
당시 천하영재를 다 모아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일패도지(一敗塗地:여지없이 져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됨)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무슨 전래하는 무예나 병법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개소문이의 용력이나 지혜는 감히 당나라에서 상대할 생각을 못하였다. 중국에서는 무예가 18반무기를 사용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무기를 사용하였으며, 당나라에서는 손오병법(孫吳兵法: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사용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병법을 사용하였으며, 또한 중국에서는 진법(陣法)을 팔문법(八門法)이 유행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진법을 사용하였는가 한 건도 역사에 전하는 것이 없다.
그저 개소문이 용맹하였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이여. 연고학(硏古學:고고학)을 좀 연구하고 역사를 쓰라는 말이다. 당시 민생의 풍속은 무엇이며,
국가정치는 무엇이라는 것도 현대 우리가 보는 국사(國史)로는 알 수가 없다.
주자학파는 교파(敎派:교종)가 대부분인 것 같고 심파(心派:심종心宗)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학자님들이 우리나라에 전래하는 성리학을 연구하신 분은 주자학파의 대립이 무서워서 발표를 안했다.
우리나라에도 화담, 북창, 남명, 구봉, 율곡, 고청, 미수 등 여러 선생이나,
박엽(朴燁), 허생(許生), 진묵(震?), 서산(西山), 사명당(四溟堂) 같은 (옛부터 전래된) 성리학자들은 거의 다
그 명가(名價:명예나 평판)가 별로 나지 못하고 은군자(隱君子)에게서 무수한 위인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율곡선생 한 분만이 문묘(文廟:공자사당)에 배향되고 다른 선생은 구두(口頭:입으로 하는 말)에도 오르지 못한다. 이것이 오로지 주자종주파의 전횡이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가 회고할 때는 이조문화가 선조대왕시대까지는 그래도 전(傳)함이 있었으나 그후는 아주 흔적을 숨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인물들은 인조대왕 때에 그치고 효종대왕 때에도 약간은 군자가 있었으나, 감히 출두를 못하였던 것이다. 그후 200년간은 역사에 기록할만한 자료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금일 역사가들이 무엇을 참고로 붓을 드는가 의심된다.
우리나라 인물 전기부터 나는 왜곡되었다고 본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전기(傳記)라 하는 것은 어떤 인물이고 자초자종까지 상세히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임진란에 이충무공이 세기의 위인으로 성공한 이유가 자초지종까지 상세히 기록해야 다음에 제2의 충무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가치라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가들은 어떤 인물이고
그 성공 당시 업적만 기록해서 후인이 따라갈 노정(路程:과정)이 없게 하는 ‘일단 거두절미(去頭截尾)문학’이라고 본다.
이충무공이 소년시대에 무슨 수양을 해서 어느 정도의 계단에 갔다가 관직에 나아가 (어떻게) 이것을 활용하였을까?
명량대해전 같은 것은 신비적이요, 절대로 상대성 전략이 못되는 것이요, 노량대해전도 역시 보통으로는 상상도 못할 전과요.
10여차 전쟁이 다 이런 종류이다. 후인은 말하기를 충무공은 구선(龜船:거북선)으로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이 구선을 만들게 된 원인과 그 방식이 명기(明記)되어야 할 것인데, 의외에도 구선에 대한 평면 외관도는 있으나, 입체도나 설명도와 해설이 없고 충무공이 구선을 만들게 된 자초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나라 인물지의 부족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율곡 선생과 이충무공 선생 간에 야담이 많은데, 이 야담을 구체화해서 아주 충무공 실적(實蹟:실제의 자취)으로 후인들이 나도 이런 위인이 되고 싶다면
이런 조건을 구비해야겠다고 준비할 만큼 명료하게 기록하지 않고
다만 출세 후에 세상에서 다 아는 행사로 그 인물의 칭찬이나 해서 외양으로 번지르하게 써놓은 것뿐이다.
이조인물 누구라도 다 보면 단처 없는 인물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인물전만 가지고는 후인이 알 길이 없다. 내가 예를 이충무공을 들었으나,
위인전기에 우리나라 인물 전기는 다 그렇다고 본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역사가들의 단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가들이 자기들 역량껏 고인들의 행적을 조사해서 후인의 모범이 될만한 일이 있다면
이것을 잘 기록해서 교재를 만들던가 그렇지 않으면 전기로 출세하든지 해서 국가나 민족에게 유리하게 하라는 것이다.
현대 역사가들이 질적으로 좀 부족한 것은 가리지 못할 사실이다.
역사가들이 구고학(究古學:고고학)부터 연구하라는 말이다.
고고학에 아무 소양이 없이 역사가로 출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문헌으로만 역사를 배우고 실지에 있어서 역사가 될 자격이 없는 인물들이 책 저술이나 할 생각으로 역사가가 되는 것은 후인에게 죄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중언부언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전래하는 고대문화가 한 건도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서 한심을 금치 못하고 이 붓을 드는 것이다.
내가 약간 이런 정도로 말하는 것이요,
사실에 있어서는 중국이나 인도나 구미(歐美:유럽과 미국)나 고철(古哲:옛 철인)들이 다 우리나라에 장래 구세주가 나온다고 말한 일이 있고 현 인도 요가성(聖:성인)도 간방에 대성(大聖)이 나오신다고 말씀한 일이 있다.
이런 것은 종교가들은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구미에서 동양철학을 연구하는데 우리 현대 청년뿐만 아니라 유식층도 고대철학이라면 덮어놓고 미신이거니 하고 반대하니,
현대인이 말하는 구미선진국에서는 동양철학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고대철학을 미신이라고 반대하니 현대인들이 숭배하는 구미선진철학가들은 미신자로 인정하고 자기들은 판단력이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인들이 여러 가지로 보아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고대부터 전래하는 철학을 일층 더 연구하고
다시 청장년들을 수양시켜서 인재를 한 사람이라도 속히 양성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재삼 고하는 바이다.
우리의 고대철학 연구방식은 우리가 다 알게 경서(經書)에도 있고, 또는 우리의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음)하는 데도 있고,
다른 종교에도 이 법을 다 전하는 데가 있는데, 대동소이하여 어느 법으로든지 알기 용이하고 성공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며,
역사가들이 피상적 역사를 저술하는 것을 반대하며 실질적으로 우리의 고전(古典:고대문화:화랑도)을 부활시켜 보라는 것이다.
계사(癸巳:1953년) 3월 21일 봉우지죄근기(鳳宇知罪謹記)하노라.//끝